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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길 Jan 05. 2021

시작부터 망해 버린 미국 이민 생활

사기당하고 시작한 미국 이민 (1)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내 삶에서 가장 벅차고 요란했던 7년의 시간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발신인은 십 년 전에 미국으로 떠난 친척 언니였다. 언니네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로는 줄곧 소식을 주고받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연락이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어떻게 내 상황을 알았는지, 언니는 내가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남들처럼 어학연수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했다.


입에서 함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나의 십 대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첫사랑으로 품고 심플 플랜과 마이 케미컬 로맨스와 같은 영미권 록 음악에 절여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서양 스타들을 통해 본 미국은 자유와 낭만, 유머가 살아있는 국가였다. 또한 미국은, 단체 중심의 한국 사회에 반발하는 개인주의자에게 반드시 도달해야 할 도피처로 비치는 나라였다.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나는 염원하는 마음으로 미국을 원했다.


미국을 그토록 열망했던 십 대 때는 기회가 없어서 인생에서 미국이란 단어를 잊었더니, 갑작스럽게 운명이 나서서 미국행 제트기를 집 앞에 대령했다. 인생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맞았다. 마지막 방점은 흥분이 식기 전에 등장한 언니네 부부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딘가 수상하다!


우리 가족과 언니네 부부가 만난 것은 두 사람이 한국을 떠난 이래로 처음이었다. 언니는 170cm의 큰 키에 수척하고 초라했다. 오랫동안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웨이브 없는 머리카락은 윤기 없이 푸석했다. 엄마가 미국에서 잘 산다는 사람이 촌스럽다며 놀렸다. 언니는 검게 변색된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미용실에 갈 시간이 없다. 바빠서 얼굴에 화장품 바르는 것도 잊고 산다 아이가.”


반면 형부는 땅딸막한 키에 배가 둥글게 부풀었고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곱슬머리를 뒤덮은 새하얀 새치와 까무잡잡한 피부, 깊은 눈매가 남미인을 연상시켰다. 형부는 내 상상 속 교포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유롭고 이국적이었다. 두 사람은 한 집에 사는 부부답지 않게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지만, 우리 가족은 두 사람이 풀어놓는 지구 반대편 소식에 취해 부부의 수상함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언니 부부는 첫 방문 때 부모님의 마음을 꽤 성공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며칠 후 이번에는 형부 혼자서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있다며 우리 가족을 다시 찾아왔다.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라니. 범죄 영화에서 어리숙한 피해자를 꾀어낼 때 쓰는 단골 멘트 아닌가?


형부는 미국에서 한인들이 선호하는 사업이라며 액세서리 판매를 권유했다. 월 수익이 $10,000, 한화로 1,000만 원 이상이라고 했다. 주장의 근거는 초기 투자금이 적고 친구 A가 중국에서 액세서리를 떼 오는 중간 도매상이니,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형부의 주장을 바탕으로 투자 대비 수익을 계산했다. 세 가족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처음에 부모님은 나만 미국에 보낼 계획이었으나, 형부의 사업 제안을 듣고 생각을 고쳤다. 가족 모두 미국으로 떠나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부는 핸드폰에 저장한 액세서리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국은 작은 펜던트에 섬세한 디자인이 특징인데 반해 미국의 것은 하나같이 크고 요란했다. 액세서리라기보다는 죄인에게 채우는 족쇄처럼 보였다. 아무리 한국과 미국에서 추구하는 미가 서로 다르다지만 이런 디자인이 판매된다니 신기할 다름이었다.  


후에 부모님은 형부와 함께 사업 및 거주 환경 확인 차 미국에 방문했다. 형부는 우리가 임대하여 장사하게 될 가게 자리로 부모님을 안내했다. 그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형 뷰티 서플라이(Beauty Supply)다. 우리는 매장 내 한 코너를 임대하여 액세서리를 판매할 계획이었다. 형부는 이미 매장 주인과 임대 관련 얘기를 끝냈지만 해당 코너에 세 들은 세입자 하고는 아직 오고 간 얘기가 없다고 했다. 그는 세입자가 눈치 채지 않게 액세서리 코너를 확인하고 나오라며 부모님만 매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매장 한 편에 액세서리 디스플레이가 설치된 빈 공간이 있었다. 형부 말대로 세입자가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었는지 디스플레이 안에 액세서리가 거의 다 빠져 있었다. 부모님은 실제로 사업을 할 수 있는 공간과 매장 안을 오가는 수많은 손님들을 보면서 새로운 꿈을 꾸었다.


다음으로 형부는 액세서리 도매상인 친구 A를 부모님께 소개했다. 그는 부모님이 사업을 하게 될 매장에 액세서리를 공급하는 중간책이라고 했다. A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007 가방과 흡사한 가방을 꺼내보였다. 안에는 각종 액세서리가 가방을 밀고 나올 만큼 가득하게 담겨 있었다. 트렁크 곳곳에 흩어진 액세서리 팸플릿도 형부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아빠는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골프 투어를 다녔다. 아빠의 파트너는 형부와 도매상 친구 A, 다른 뷰티 서플라이를 운영하는 친구 B였다. B는 아빠에게 뷰티 서플라이의 사업 방법과 수익 구조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누가 봐도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처럼 보였다. 얼굴에서는 부내가 기름기처럼 반질반질 흘렀다. 실제로도 씀씀이가 좋아서 가는 곳마다 대접을 받았다. 그런 B를 곁에서 보면서 부모님은 우리 가족도 똑같이 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미국 이민 생활에 환상을 심어준 사람은 비단 B 뿐만이 아니었다. 형부는 부모님에게 방 5칸짜리 집을 보여주며 세입자들에게 세를 받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사업으로 지출이 많아서 정작 형부 부부는 아파트에서 살지만 월세 덕에 생계에 큰 지장은 없다고 설명했다. 부모님이 머무는 동안 친척 언니는 보란 듯이 월세를 받으러 갈 때 부모님도 데리고 갔다. 부모님은 차에 앉아서 언니가 월세를 받고 나오는 걸 지켜보았다. 형부는 곧 이사 갈 집이라며 부모님에게 푸른 잔디가 깔린 하우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월세를 받고 있는 집 보다 배는 크고 아름다운 집이었다. 공간이 넉넉하니 우리 가족도 함께 살자는, 듣기에 퍽 좋은 소리를 덧붙였다.


형부가 짜둔 판을 모두 둘러본 부모님은 흡족했다. 인생 후반기에 맞이할 새로운 인생을 그려보니 활력이 솟구쳤다. 형부는 부모님 얼굴에 감도는 환한 빛을 감지하고는 기세를 몰아서 속내를 꺼냈다.


이삿짐 싸기도 바쁘실 테니 제가 미리 매장 주인과 계약하겠습니다. 중국에서 물건 떼 오는 시간도 있으니까 사업 자금을 미리 주시면 제가 세팅해 둘게요. 그래야 두 분이 오시자 마자 일을 시작하실 수 있으니까요."


돈 이야기가 나오자 부모님 마음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부모님은 귀국 날짜를 핑계로 한걸음 물러섰다. 한국에 돌아온 부모님은 미국에서 둘러본 정보를 취합하여 한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직접 눈으로 본 미국은 분명 매력적이었으나 한평생 살아온 한국을 떠나기가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한국에서 운영하던 아빠의 사업체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 가족에게 안정적인 수익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부모님은 이 모든 걸 정리할 용기가 선뜻 생기지 않아서 한동안 답을 보류했다. 기대했던 답이 돌아오지 않아서였을까, 형부는 부모님이 한국에 돌아온 후로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다. 매장 주인이 다른 세입자와 계약하려고 한다, 이 좋은 자리를 빼앗기게 생겼다, 친구 A가 중국에 물건을 떼러 가야 되는데 답을 주셔야 우리 사업 물건도 함께 떼올 수 있다- 등 형부는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부모님을 재촉했다. 빗발치는 형부의 재촉에 부모님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부모님이 판단하기에도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일단 계약금만 보내자. 나머지는 우리 가족이 미국에 들어가면 준다고 하고.”


아빠는 엄마의 의견에 동의하며 미국에 있는 형부에게 계약금만 안겼다. 매장 계약까지 한 마당에 더 이상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 가족은 살던 아파트를 전세 주고 야무지게 짐을 싸든 채 미국 조지아주로 날아갔다. 언니네 부부를 만나고 불과 석 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거 몰래카메라죠?


단기간에 불타오른 열정과 희망은 예상치 못한 시련 앞에서 맥없이 꺼졌다. 형부는 우리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일이야 있겠냐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언니는 형부가 사업차 남미로 출장을 갔다며 곧 돌아온다는 말만 반복했다. 형부 역시 아빠와 주고받는 이메일 상에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우리 가족을 안심시켰다. 가족 간의 신의를 지키고자 했던, 순진한 우리 가족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형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형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길함 속에서 사업 자금으로 들고 갔던 돈은 생활비 명목으로 꾸준히 새어나가고 있었다. 신경을 갉아먹는 불안함 속에서 아빠가 형부를 재촉했다. 그런 아빠에게 돌아온 소식은 머리를 후려치는 수준의 큰 충격이었다.




형부가 남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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