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판다 Nov 17. 2021

수능 망친 사람도 잘만 산다

그래도 모두 대박나시길

내일이 벌써 수능시험일이다. 코로나 시국에 공부하느라 고생한 수험생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기를 바라며 나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2002 월드컵이 개최됐던 해에 수능시험을 봤다. 점수가 발표되던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러 가장 먼저 꺼낸 말씀은 "재수해라"였다. 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인 믿을 수 없는 세 자리 숫자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능을 망친 걸로도 모자라 운도 따라주질 않아서 지원한 학교에 족족 미끄러졌다. 나는 수능을 망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반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서울에 실패했다. 수시마저도 모두 실패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어느 날은 학교 가는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 동창에게서 나의 대입 실패 이야기가 다른 반에서도 한동안 회자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로는 그 친구를 먼저 발견하면 다른 칸으로 얼른 몸을 피했다.


려운 경제상황 때문에 집에서는 재수를 허락하지 않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입학을 하면서 속으로 반수를 다짐했다. 그런데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학교 생활이 너무너무 재미있는 거다.

우리 과는 학과 특성상 책상 앞에 앉아 학문을 탐구하는 곳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카메라를 들쳐 매고 봄날의 똥강아지처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거나 친구들과 우르르 다니며 영화를 봤다. 과제로 TV 광고,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물을 만들었다.


수능을 치르고 학교와 과를 정할 때 1 지망은 소위 안전빵이라는 보험 개념으로 지원했는데 나는 그때만 해도 1 지망 학교를 가게 될 거라곤 꿈도 꾸지 않았던 터라 점수에 맞춰 써냈기 때문에 우리 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까 수업이 노는 것과 별 반 다르지 않고 방송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과에는 이상하고 웃긴 사람들 천지라 학교 생활이 너무 재미있는 거다. 1학년이 끝나갈 때쯤에야 까맣게 잊고 있던 반수 생각이 났다.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가 얼마나 의지박약 한 인간인지를 깨달은 후 다른 학교로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4년을 다녔다. 하지만 재미있게 다녔다고 해서 학교에 대한 애정이 생긴 것은 아니어서 학교에 다니는 내내 부끄러웠다.




그래서였는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매년 수능시험을 망치는 악몽을 꿨다.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특히 수능 시험이 가까워지면 여지없이 꿈을 꿨다. 내 시험지만 백지일 때도, 샤프심이 자꾸만 부러질 때도 있었는데 늘 거기서 거기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문제를 푸는데 나만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 상황. 잠에서 깨면 배게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는데 그것이 땀자국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수능시험을 봤던 2002년 11월이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여전히 누가 대학 얘기를 꺼내면 움츠러들었고 나를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할까봐 걱정했다. 나를 실패자로 여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는데 그걸 모르고 남들 시선을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자인가? 당연히 아니다.

수능시험과 대학 입학이 인생에서 중요한 포인트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나의 존재 가치를 결정할 정도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일 리가 없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를 실패자의 프레임에 가두고 스스로를 별 거 아닌 사람으로 치부했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마다 주저하고 포기했다. 대학은 인생에서 밟고 나갈 수많은 점들 중 하나일 뿐이란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좀 더 괜찮은 내가 됐을 거다 분명히.


하지만 좀 더 멋진 내가 되지 못했음에도 나는 잘 살고 있다. 수능시험을 망쳤지만 인생은 망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학교와 과에 입학하면서 덕분에 몰랐던 나의 재능을 발견했고 방송국에서 정말 재미있게 일했다. 방송국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즐겁게 일하고 있고 좋은 사람과 알콩달콩 하면서 사는,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중이다. 남은 삶은 더 잘 살 자신도 있다.




삶이란 건 어떤 방향으로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수능시험? 그까짓거 별 거 아니다. 어린 학생들, 청춘들은 나처럼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 바란다.

인생은 길고 기회는 많으니 화이팅이다!

작가의 이전글 똥꿈을 꾸고 복권을 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