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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다 Sep 19. 2021

남편도 눈치 보느라 명절이 힘들답니다


"엄마가 이번 추석에는 차례  안 지낸다고 밥이나 먹으러 오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차례상을  차리지 않으니 전날 어머니 집에 가서 음식 장만을 도울 필요도 없고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비몽사몽 한 채로 부산을 떨 일도  없다. 푹 자고 일어나 부모님 댁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설거지는 해야겠지만 음식 수가 줄면 자연히 설거지할 그릇도 줄 테니 부엌데기 신세는 면하겠다.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하며 좋아하고 있는데 이상하다. 차례 생략 소식에 나보다 남편이 더 싱글벙글이다. 어째서지? 저 사람은 명절 노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던가.


나의 시가에서 '최고 권력자'인 시어머니의 아들들은 철저한 기득권층이다. 가사 노동에 일절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식사자리에서는 상석에 앉아 가장 맛있는 음식을 밥그릇 바로 앞에 대접받는 특혜를 누린다. 그러면서 먹을 게 있네 없네 느끼하네 어쩌네 반찬 투정을 부려도 욕을 먹지 않는다. 밥을 먹은 후에는 깎아 준 과일을 조금 집어 먹고  누워서 빈둥대다 졸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명절 당일 부모님 댁에서 밥만 먹고 오면 된다고 좋아하는 게 어이가 없어 한 소리 하려다가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짚이는 게 있다. 


"오빠."

"응?"

"내 눈치 안 봐도 돼서 좋아?"

"응!나 어깨 펴고 있을 거야!"


벌써부터 어깨를 쭈욱 피면서 이번 추석에는 내 눈치를 보지 않을 거라 당당하게 말하는 남편이다.




남편은 명절만 되면 잔뜩 쪼그라들었다. 내가 타박하거나 짜증을 내기 전에 미리 내 눈치를 살피곤 했다. 그 큰 덩치가 어깨를 종이 접듯 접고 구부정한 자세로 분주하게 눈알을 굴리는 모습은 길가에서 비 맞는 강아지 같고 집에서 늘 대자로 퍼져 있던 사람이 내 부름에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로 긴장해서 앉아 있는 모습은 군기가 바짝 든 오분 대기조가 따로 없다. 뭐 가지고 싶은 건 없는지 수시로 물어보는 것은 덤이고.


명절이 올 때마다 남편이 나에게 미안해하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음식을 잔뜩 차려놓아도 먹을 게 없다고 타박하면서 다음부터는 배달음식 시켜 먹자고 미운짓 하는 것도, 어머니한테 괜히 짜증을 내는 것도 다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는 거. 나를 도와주고 싶어서 고무장갑이라도 낄라 치면 어머니가 질색하시는 통에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본인도 답답했을 거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눈치보고 기죽어 있을 일이 없으니 남편도 숨통이 트이나 보다. 




불공평한 가사노동에 아내는 화가 나고 남편은 졸지에 죄인이 되는 명절은 대체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날이란 말인지?

구시대적 명절 분위기를 바꿔보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며느리짬밥을 어느 정도 먹었을 때, 나는 나대로 허례허식의 상차림을 간소화 하고 아들들도 가사 일을 나눠서 하자며 봉기했고 남편과 형네 부부도 적극적으로 지원 사격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완강한 고집에 늘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시어머니라서 자식들로서는 강하게 불만을 표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누구 하나  얼굴 찌푸릴 일 없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명절이면 좋을 텐데. 다행히 나보다 어린 세대에서는 조금씩이나마 평등하고 자유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니 진심으로 기쁘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그 전까지는, 차례가 다시 재개되는 순간 끝나버릴 한시적 해피 홀리데이지만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겨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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