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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산 Dec 21. 2024

이상과 지금과 손님

과거의 나에게 말하다.

학창 시절 쓰던 일기장,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 심지어 초등학교 때 쓴 일기와 문예 노트까지…

다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난 추억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소식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편지까지도 한 시절 만나 서로를 성장시키고 각자의 길을 간 소중한 흔적이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 일기를 보니 가관이다.

'언젠가… 아니 곧 중년의 나이가 되어 내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게 될 거고, 그리고는 곧 힘이 없어질 텐데, 능력이 있을 때 큰일 하나 해놔야 되지 않겠는가?'

마치 예언처럼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여놨다.


16~20세의 나는 밤마다 혼자만 아는 고통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대었다. 아마 새벽 두 세시까지 끄적이고 있었겠지. 천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못해 고민하기도 했고, 제 이상에 맞춰 너무 완벽하려고 했다. 입시 미술을 뒤늦게 시작하고 본인은 천재이니 6개월 정도면 선생님보다 잘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턱도 없는 기준을 세워 놓고, 혼자 목표를 이루지 못해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이라니….


슬며시 아는 아이 곁에 다가가 앉아 본다.


"넌 뭐가 그렇게 괴로워?"

"난 엄마 힘든 얘기도 잘 들어줘야 하고, 동생들한테도 좋은 언니여야 하고, 공부도 잘하고 싶고, 그림도 잘 그려야 되는데…"

"세상 그 누구도 그걸 다 잘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난 천재가 되고 싶다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음… 그렇구나! 그런데 말이야, 천재가 되면 뭐가 좋을 것 같아? 좋은 사람이 왜 되고 싶어? 성공하면 뭐가 좋은데? 어떤 사람이 성공한 사람일까?"

"…"

"나는 네가 그냥 푹 잤으면 좋겠어. 살다가 네가 꿈꾸는 어떤 모습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걸 이루기 위해 산다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거든.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충분해!! (자자~제발 자자~~~)"


'그 애는 아직 어려서, 미숙해서, 전두엽이 덜 발달한 청소년기라 그렇지, 아무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때때로 찾아오는 오래 알고 지낸 손님 같은 기분이 있다. 땅속으로 스며드는 듯 축 가라앉고 무기력해지며 슬퍼지기도 하는 그 마음. 떨치려 할수록 더 강하게 감아오는 마음이다.

이 손님이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손님이 찾아온 방에서 두 명이 갈등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 명은 'to do list' 나열의 달인, '이상'씨. 한 명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 '지금'씨. 이상 씨가 지금 씨를 몰아세우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이론에 약한 지금 씨는 지원군을 부른다. 소환된 손님이 지금 씨의 입장이 어떤지, 그 감정이 얼마나 타당한지 편들기 시작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이상적인 혼자만의 계획을 세워 강요하는 이상 씨는 더 노련한 중년의 신사가 되어 중년이 된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도 속수무책으로 듣기만 하던 옛날 그 아이가 아니었다. 이상 씨의 계획도 중요하지만, 현재를 관찰하고 느끼는 지금 씨의 상태도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상 씨의 계획은 지금 씨가 모두 이룰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이상 씨가 손님의 설득으로 잠잠해진다. 축 처져 있던 지금 씨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번진다. 예전에는 이상 씨가 도통 말이 안 통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던 손님과 지금 씨는, 이제 협상이 되어 다행이라 느낀다.


요약하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중요한 것부터 정돈하여 브런치북으로 묶어놓고 다음 기획을 해보려는 욕심으로 계획을 세우다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협상 결과 그냥 지금 가장 크게 마음을 두드리는 말부터 하기로 했다. 정리는 나중에 할 수 있다. 기획해서 일관성 있는 진행을 하기에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써 놓고 일관성을 발견하자. 그거 가능하지? Of 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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