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4살이 되던 1992년에 약관의 나이로 등장한 서태지. 이젠 한국인 대부분이 그의 이름은 들어봤겠지만, 당시 첫 방송 출연에서 서태지를 알고 있던 사람은 락 음악의 대선배 전영록뿐이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앨범의 첫 트랙인 "Yo! Taiji!(이후 4집까지 모든 앨범의 인트로는 이 제목으로 갑니다)"에서 서태지는 당당하게 "난~~ 알아요!"라고 외칩니다. 뭘 알았을까요? 가사는 이별에 대한 예감을 말하지만, 어쩌면 서태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걸 쭉 해나간다면, 자신과 생각이 같은 청자들의 호응이 따라올 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 무엇을 망설이나, 되는 것은 단지 하나뿐인데
인트로를 거쳐 2번 트랙에서 나오는 타이틀곡 "난 알아요"는 상당히 골 때리는 곡입니다. 신스 사운드로 시작하고 댄스음악의 샘플들이 나오는 가운데 랩으로 노래를 시작하지만 간주에서는 제법 묵직한 메탈 풍의 기타 리프가 나옵니다. 그리고 후렴부는 노래를 합니다. 이 난해함에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기준으로 노래를 평가했고, 10점 만점에 7.8점이라는 점수를 매겼습니다. 하지만 "난 알아요"는 4살짜리도 따라 하는 국민가요가 됐죠.
후속곡인 "환상속의 그대" 역시 인기를 이어가며, 장기자랑 시간에 다들 머리 위로 손을 흔드는 춤을 추게 만들었습니다. 이 곡에서는 잠시 시나위에 몸 담았을 때 나온 4집 앨범의 수록곡인 "Farewell To Love"의 후렴을 샘플링해버립니다. 그뿐인가요? "Rock'n Roll Dance"에서는 AC/DC의 대표곡인 "Back In Black"의 메인 기타 리프를 차용합니다. 그 외에도 "내 모든 것"의 간주에서 몰아치는 기타 솔로 역시 서태지의 음악적 뿌리인 락에 충실합니다. 밴드를 뛰쳐나와 댄서 출신 멤버 둘을 영입해서 댄스음악을 시도한 서태지의 큰 그림에 놀랄 따름입니다.
#3. 락앤롤, 헤비메틀, 재즈, 클래식, 펑키, 블루스! 어떤 리듬에도 우리는 춤추고 싶네
물론 이 앨범은 락/메탈의 요소를 잘 버무렸지만, 근본은 댄스음악이고 미디 기반의 음악입니다. 그리고 발라드 풍의 노래가 아우트로 격인 "Missing"을 포함해 무려 4곡이나 있습니다. 특히 "이밤이 깊어가지만"은 싱잉 자체는 발라드지만, 곡의 리듬이 댄스에 최적화되어 있고,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나 "이제는" 역시 곡의 리듬이 댄스를 곁들이기에 어려움 없이 구성돼 있습니다. 메인 보컬 없는 '프로듀서-댄서' 조합에서 나름 돌파구를 찾은 셈이죠. (실제로 1집 라이브를 들어보면 특히 "난 알아요" 도입부에서 서태지의 처절한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또르르) 노래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만, 전부 이별 얘기라 내용상의 진부함이 느껴지긴 하죠. 아무튼 인트로와 아우트로를 제외한 7개의 곡("Blind Love"는 "난 알아요"의 영어 버전입니다)이 전부 춤을 추며 부를 수 있는 노래라는 데서 다시금 서태지의 먼치킨스러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단지 그것뿐인가 그대가 바라는 그것은
이 앨범은 유독 곡에 '~ version/mix'라고 쓰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소한 원곡이 있다는 의미고, 다른 버전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난 알아요"의 경우 방송용 버전이 따로 존재했고(나중에 15주년 기념 앨범을 내면서 정식 공개했습니다), 1집 발매 이후 <Live & Techno Mix>라는 앨범을 내면서 1집 수록곡들의 다른 버전들을 내놓았습니다. 특히 "환상속의 그대"는 1개의 라이브 버전과 2개의 리믹스 버전이 있는데, 이중 Part III로 알려진 Techno Taiji Mix 버전이 대중들에게 더 알려지는 기현상이 나타났고, 이후 <Goodbye Best> 등에서도 원곡 대신 Part III가 실리게 됩니다. 보다 나은 결과물을 추구하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집착하는 서태지의 성향이 이렇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죠. 확실히 "환상속의 그대"는 원곡에 비해 리믹스 버전들이 훨씬 나은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5. Summary
많은 데뷔 앨범이 그렇듯 아쉬움이 있는 앨범이지만, 곡들의 구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들으면 하나하나의 곡들이 다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대중들이 듣기 어렵지 않게 만들어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문화대통령'의 기반은 이미 첫 앨범에서부터 마련돼 있었던 것입니다. 2집, 3집이 숨겨둔 걸 본격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과정이라면 1집은 서태지가 일단 자신의 역량을 모두 때려 박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앨범 전체의 구성은 다소 아쉽지만 곡 하나하나가 아직도 라이브에서 한 번씩 부를 만큼 좋습니다. 당연히 필청각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