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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카제 Jul 20. 2022

[주택살이 9]한 여름에 꺼내 쓰는  벽난로의 추억

겨울이 좋아진 이유는 흰 눈과 따끈한 차, 그리고 벽난로...

동료: 얼른 겨울 왔으면 좋겠다

미정: 겨울엔 또 그럴 걸
얼른 여름 왔으면 좋겠다.
지금 기분 잘 기억해 뒀다가
겨울에 써먹자.
잘 충전해 뒀다가 겨울에...

동료: 그럼 겨울 기억을 지금
써먹으면 되잖아요.
추울 때 충전해둔 기억 없어요?"

- 나의 해방일지 대사 中 -


왜 없겠는가. 나는 경기도에 사는 사람인데...

요즘 같은 날씨에 꺼내보기 좋은 겨울 추억이 내겐 많다.


원래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 시린 스산함이 싫었고, 꽁꽁 싸매도 스며드는 추위가 싫었으며,

후 질퍽거림과 지저분함도 싫어했다. 추위와 눈을 싫어하니 겨울 또한 반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용인에 오고 나서 겨울이 좋아졌다.

첫해 친정엄마가 이사 기념으로 겨울 털이 많이 달린 방한화를 사주신 기억난다.

흡사 에스키모인들의 투박한 부츠 같은 신발이었다. 

그 의아함이 감사함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용인 동백에서 경험한 겨울은 특별했다.

서울과 달리 집 산과 정원, 도처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 그리고 나지막한 옆집 담벼락과 지붕에까지 내려앉은 눈은 세상을 압도했다.


가 서울에서 본 눈은 새벽부터 누군가가 부지런히 뿌린 염화칼슘과 찍부터 제 일을 위해 달리는 차와 사람들로 곳곳이 회색으로 변해버린 지친 눈이었다.

이곳에서도 도로 위 눈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주택가 골목에서는

하얗게 쌓인 생기 있는 눈을 볼 수 있다. 눈이 부실 정도의 반짝임 그대로 말이다.


이사 온 이후 만나는 겨울은 확실히 달랐다. 이곳에서는 스산함이 빚어내는 회색 풍경도 낭만적으로 느껴졌고, 눈이 오면 집집마다 썰매를 들고 나오는 아이들 모습도 신기했으며, 벽난로와 크리스마스 전구가 빚어내는 따뜻한 집안도 너무 좋았다.

작년에 중학생 아들이 자신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너무 좋고, 캐럴송과 전구만 보면 행복감이 솟는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이 말이다.

집을 살 때 원래 거실 한 켠에 벽난로가 있었다. 내가 사는 집에 벽난로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벅차올랐다.

하지만 실제로 관리하고, 매번 불을 피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이 쓰진 않지만, 추운 겨울날 주말 아침에는 꼭 불을 피운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은 마치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 종합예술과도 같다.


불 좀 붙여본 사람은 알 것이다. 큰 나무만 있을 때 절대 불이 붙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에는 잔가지와 얇은 참나무들에 불이 붙고 활활 타오르며 서서히 큰 장작으로 옮겨 붙어야 드디어 제대로 타는 것이다.


그리고 장작의 순서만큼 중요한 것이 공기이다. 나무를 넣기 전 맨 먼저 벽난로 내부의 온도를 높여야 한다. 처음에 그것을 모르고 무작정 불을 피웠다가 집안으로 새어 들어온 연기 때문에 무척 고생을 한 기억이 있다.

벽난로의 연통은 외부와 연결되어 있기에 벽난로의 화구를 열면 시린 찬바람이 훅 들어온다. 이런 상태에서 불을 피우면 연기는 따뜻한 실내로 역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구 내부를 충분히 예열해, 이러한 역류현상을 방지해야 한다.


예열이 끝났으면, 본격적으로 나무를 쌓는다. 불에 잘 붙는 잔가지와 얇은 참나무를 쌓고 중간중간 불쏘시개를 배치한다.

나의 불쏘시개는 계란판이다. 압축된 종이라 훨씬 오래 제 역할을 잘한다. 이렇게 나무를 크기별로 쌓고 사이사이에 계란판을 찢어 놓는다. 나무 사이에 공기와 바람이 잘 통하도록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재받이도 열고, 연통과 연결된 바람구멍도 열어준다.

이제 본격 토치로 불을 붙이면 수분이 지나지 않아 활활 보기 좋게 타오른다. 그다음엔 바람구멍을 통해 불 조절만 하면 된다.

모든 일이 그렇듯 벽난로 불 피우는 일도 순서와 시간이 필요하고, 불쏘시개와 잔가지들의 역할도 크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대개 큰일을 그 일 자체로 결론만 기억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 수많은 사소한 만남과 작은 일들이 있었고 그것이 모아져 지금의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은 쉽게 잊는다.

다들 큰 장작만 고르고, 그 장작만 믿고 의지하지만 작은 가지들의 노력과 희생 없이는 큰 장작에는 절대 불이 붙지 않는다. 하찮은 계란판조차도 맹렬하게 타오르며 일조하듯 그 작은 노력들이 모여 드디어 큰 장작에 옮겨 붙을 때 본격적인 일은 시작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믿음직하고 따뜻하게 타는 일 말이다.


지금 아직 인생에 불이 붙지 않았다고 느낀다면 잔가지들을 챙겨보자. 계란판도 버리지 말고 넣어보자.


큰 장작에 불이 안 붙은 이유는 내가 생각한 원인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놓친 사소한 것들을 챙기다 보면 어느 순간 공기와 화력이 만나는 시점에 폭발하듯 큰 불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 브런치도 나에게는 소중한 잔가지다. 성실히 잔가지를 모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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