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초록이 짙은 계절, 햇살 들어오는 시간에 ㄱ자 거실창을 모두 열고 숲을 들이는 시간이다.
바람과 소리, 빛과 초록향이 그대로 느껴져 말 그대로 그 순간은 오감멍이 가능하다.
은사시나무의 떨림
집 앞 숲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에는 단풍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심겨 있는데 특히 내가 아끼는 것은 은사시나무다. 어느 날 바람소리에 섞여오는 '사사사사~' 잎 부딪히는 소리가 그리 좋더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 잎들이 눈부시게 빛나며 재잘되는 소리는 이래저래 굳은 내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덩굴의 습격
몇 해가 지나고 문득 보니 몇 그루 사이좋게 있던 사시나무가 그해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두 그루 정도를 제외하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잎을 피우지 못했더라. 식물 박사이신 친정엄마를 모시고 집 앞 숲으로 들어갔더니 그 큰 나무를 덩굴이 휘어 감고 있었다.
엄마가 "얘 때문이네. 얘가 양분을 다 가져가니 죽은 거지 쯧쯧"
엄마랑 나는 되는대로 덩굴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나무는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나무라도 지키자는 마음으로.
덩굴이 정말 촘촘히 나무에 촉수를 꽂고 기생하고 있었다. 잎과 줄기를 분리하는 순간 '다다다다' 뽑히는데,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덩굴이야 지지대가 있으면 담벽이든 건물이든 타고 올라가는 게 습성인 식물인데, 제 할 일 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10m 넘는 사시나무가 고작 자신을 휘어 감는 덩굴에 아무것도 못하고 꼼짝없이 생명을 내어준 게 좀 당황스러웠다.
바람멍 명상
그해 덩굴을 제거한 덕에 올해도 시원한 사사사 소리를 들으며 바람멍을 할 수 있다.
은사시나무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 이젠 그 덩굴이 생각난다. 내 안에 마음 놓아버린 순간 날 타고 올라가는 덩굴은 없을까? 작은 생각들, 걱정들이 날 휘어 감지 않게 잘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 혹 그렇더라도 내 무릎까지 왔을 때 떼어버려야겠다는 다짐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