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이 모였다. 할머니들은 복수로 참 좋은 말이다. 할 머니는 하나로도 참 좋은데 여럿이 되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 할머니s를 줄여 할s라고 부르겠다. 할머니s의 멤버 를 소개하자면 나의 외할머니(영자)를 중심으로 영숙(첫째), 영자(둘째), 점순(막내)의 할머니들로 구성된다. 할s의 완전체는 평균적으로 1년에 두 번 완성된다. 5월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던 터라 시끌벅적한 하루가 드물 었다. 하지만 할s의 등장으로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낼 수 있 었다. 60-70대인 나이들 속에서 22살의 나는 티 안 나게 섞 일 수 있다. 우리는 이야기하는 게 너무 즐거워 앉아서 눈 감 고 잠을 잘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건 지루한 부분도 있지만 분명 내가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있다. 그녀들에게는 내 가 가지고 있지 않는 삶의 연륜이 깊게 패어있고 그건 그녀 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난다. 모두 경로 우대를 받을 나이지 만 서로는 언니이자 동생이다. 장난스럽게 동생을 놀리는 언니와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실수나 작은 일 하나하나 언니에 게 말하는 동생은 나이를 먹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점들에 서 나이 든 사람들이 좋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이 영 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순간을 아주 오래 간직하고 싶다. 우리는 일단 온갖 봄나물과 주꾸미를 사 와서 요리해 먹었 다. 할s의 요리 솜씨들은 끝내주는데 과거 영숙 씨는 광주식당이라는 아주 큰 식당을, 영자 씨는 갈빗집, 낚시터 식당, 파전집 등등 여러 식당을 운영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세 상에서 제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한 그릇 을 다 먹을까말까 하지만 할머니 집에만 가면 두 그릇 가까이 먹는다(할머니에게 사육을 당하기 때문). 우리는 봄나물 과 같이 파릇파릇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수다 삼매경에 들어갔는 데 평소 멋쟁이인 영자 씨의 물건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영자 씨에게는 옷도 화장품도 아주 많은데 할s가 모이면 그 물건들을 자매들에게 나누어 준다. 홈쇼핑에서 주문한 해괴망측한 옷이 두 벌이나 있었는데 위아래로 세트이고 아주 화 려한 무늬가 그려진 옷이었다. 그 옷을 영숙 씨와 영자 씨가 한 벌씩 나눠 입고 나의 엄마 은정이가 오면 놀라게 해 주겠 다고 다짐했다. 둘의 모습을 보고 경악할 은정이를 상상하며 우리는 아주 행복했다. 비록 젊은 시절과 달리 허리도 굽고 살도 찌고 했지만 두 송이의 꽃 같았다. 새벽까지 모델을 바 꿔가며 수많은 옷과 가방으로 끝나지 않는 패션쇼를 열었다. 그러고는 옛날이야기를 하며 새벽까지 떠들었다. 결국 가장 연장자인 영숙씨는 소파에서 앉은 채로 곯아 떨어지고 영 자 씨와 점순 씨와 나는 새벽 3시까지 더 놀았다. 종일 입꼬리가 내려가는 일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다음 날, 절을 올라가는 길에 점순 씨는 넘어질 뻔했다. 바로 영자 씨에게 “언니!! 나 넘어질 뻔했어!!!”라고 하자 영자 씨가 “어 그래 잘했다!!”라고 대답했다. 이 순간 점순 씨가 어린 아이로 영자 씨는 어린 점순 씨를 업고 다니던 젊은 20대로 보였다. 이렇게 나이는 들었지만, 서로에게는 그냥 어린 동생과 듬직한 언니일 뿐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할머니라는 존재는 나에게 ‘사랑 그 자체’이다. 얼마 전에 나의 친구 옥상정원이 내게 그런 질문을 했다. “인서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는 뭐야?” 옥상정원의 다른 친구는 “달은 항상 떠 있지만 밤에 선명하게 보여. 우리는 그래 서 달이 밤에만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은 낮에도 우리 곁에 있잖아. 행복은 그런 거 같아.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언 제나 선명하게 보이는 건 아닌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행복의 정의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 같아. 나는 행복을 어떠한 물성이 있는 것으 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내가 내 몸으로 느껴지는 느낌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그 행복의 형태는 항상 달라져.” 이러한 행복의 형태는 할머니라는 형태로 찾아오기도 한다. 평소에도 할s는 나에게 행복이지만 완전체로 완성되었을 때는 그 크기 더욱 커진다. 꽃향기가 나는 것 같고 따뜻하고 부드러 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가고 나도 나이를 먹는 것처럼 나의 행복들의 시간도 흘러간다. 그래서 오랜만에 본 할머니들의 모습이 변해있을 때면 덜컥 겁이 난 다. 저번에 봤던 모습보다 허리가 더 굽었다던가. 이마에 주름이 많아졌다던가. 어디가 아프다고 이야기하면 마음속의 불안이 커지고 우울해진다. “언젠가는 내 행복에도 부재가 오는 날이 있겠지”하는 생 각을 하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건데 할s의 모습을 최대한 많은 글과 사진으로 남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 명의 엄마를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새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