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난다. 산이
아빠의 작업실이자 일명 ‘산’이라고 불렸던 그곳이. 나의 아빠의 이름은 김성욱으로 예술가이다. 현재의 인서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성욱이다. 작업실은 동네의 얕은 야산에 위치해 있었는데 작은 컨테이너 하나가 다였지만 나의 어린 시절 모두를 담기에는 충분했다. 서예작가인 성욱은 다른 아빠들과 달리 늦은 아침 산으로 출근을 했다. 학교가 일찍 끝난 날에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면 성욱의 스킨 냄새가 엘리베이터에 진동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아, 아빠가 방금 출근했구나!”하고 바로 전화를 걸곤 했다. 아니면 성욱의 출근 시간에 맞춰 지하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리곤 했다. 작업실은 컨테이너 하나인데 두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거실 같은 공간 하나와 본격적 작업 공간 하나이다. 문을 열면 거실이 보인다. 그곳에는 직접 조각을 하는 도장이 가득 했고, 내가 무려 작년까지 썼던 20년도 더 된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또 전국 곳곳에서, 때로는 일본에서 날아온 여러 가 지 붓들이 걸려있는 벽면이 있었다. 본격적인 작업 공간은 왼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데 낮고 긴 탁자 위에 정성 들여 모은 다기 세트가 놓여있다. 성욱의 자리에는 오래된 빨간색 배경의 곰돌이 그림이 그려진 방석이 놓여있었고 그 뒤에는 직접 쓴 병풍이 서있었다. 양쪽으로는 직접 모은 LP 판과 엄마에 게 잔소리를 들으며 큰 마음 먹고 산 LP 플레이어가 있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흙모래를 만지며 마음껏 뛰어놀 때 이곳에서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자랐다. 시원한 코카콜라 대신에 뜨거운 보이차를 마시고, 바비 인형 대신에 조각 중인 도장들을 가지고 놀며, 동요 대신에 김광석 노래를 들었다. 투니버스 대신에 성욱의 투박한 노트 북으로 지브리 영화를 봤다. 새로 산 옷에 먹물을 잔뜩 묻혀 엄마에게 혼이 나는 일이 일상이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모두 다니지 않고 혼자서 자란 나는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 게 자란 줄 몰랐다. 그래도 다행히 초등학교에 무사히 입학 하여 아이들의 세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누군가 “어린 시절에 어떻게 자랐어요?”라고 묻는다면 작업실이 떠오른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친구들을 작업실에 데려가서 놀았고 운동이라면 꽝인 성욱과 함께 공놀이를 하며 놀았다. 자두나무에서 자두를 따먹고 친구들에게도 나눠주며 마트에서 산 자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당도를 자랑스러워 했다. 은정(엄마)과 성욱이 돈을 걸고 배드민턴 내기를 할 때는 열심히 심판을 봐주며 예쁜 은정의 편을 좀 더 들어주곤 했다. 주변에 있던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해결 하거나 은정과 함께 도시락을 싸가서 다같이 저녁을 먹고는 항상 별을 봤다. 별을 보면서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이라고 배우고 여러 별을 구경했다. 성욱은 하늘만 보고도 “내일 비가 오겠군.”이라 고 말할 수 있는 사내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작업실 안에 들어가 LP 플레이어로 클래식을 들으며 성욱이 끊임없이 따라주는 일명 ‘물고문’ 차를 마셨다(성욱은 지인들에게 차 를 주기를 좋아해서 작업실에 놀러 간 이들은 배가 터질 정도 로 차를 마셨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마당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놀았고 눈이 쌓이면 눈사람을 만들었다. 카메라를 좋 아하는 성욱은 2009년의 어린이날 어린 나에게도 비싼 디카를 선물해 주었다. 마당에 직접 심은 해바라기와 온갖 꽃들, 하늘과 풀을 조그마한 손으로 셔터를 누르며 사진 속에 담고 다녔다. 물론 떨어뜨릴까봐 전전긍긍하며 담아 갔다. 함께 담은 사진과 함께 써 내려간 글과 그림들을 블로그 에 올리는 법도 배웠다. 9살짜리인 나는 성욱을 따라 열심히 블로그 포스팅을 했고 점점 성욱과 닮은 삶을 살았다. 성욱 과 나는 함께 지낸 일상을 각자의 손으로 찍고, 각자 느낀 것 을 올렸다. 성욱의 예술가 친구들은 나의 블로그에도 찾아와 나의 작품과 글에 댓글을 달아주었다. 아마 나의 블로그에는 어린 인서의 향, 성욱의 블로그에는 짙은 묵향과 함께 찻잎 향이 났을 것이다. 그때의 우리는 그랬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나의 꿈은 작가였는데 속세의 무서움 을 알고 나서인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꿈이 바뀌었다. 하지 만 22살인 지금 다시 작가라는 꿈을 찾았고 작업실과 함께 자란 어린 시절의 나를 수없이 더듬는 중이다. 기억은 휘발성이 강해서 더듬지 않으면 사라지기 쉽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는 블로그에 들어가 천천히 과거를 정독한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물론 더듬지 않아도 유전자의 힘에 의해 나도 모르게 성욱을 많이 닮아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OK라고 말하는 은정이 NO 라고 말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성욱의 꿈과 같은 서예작가 가 되고 싶다고 하면 “집을 나가라”라고 말한다. 사실 서예 작가는 은정을 놀리기 위함이었고 얼마 전 작가가 되고 싶 다고 고백했다. 미래의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예술 분야의 일이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일 때문에 서울에 나가서 밤이나 되어야 집에 들어오는 내 모습을 보며 성욱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심지어 속초에서 고성까지 걸어서 여행을 갔던 내가 결국 대상포진에 걸린 모습과 제주도를 한 달 동안 걸어서 유랑하며 대상포진에 걸린 성욱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닮아있다. 속이 터져나가는 건 은정이겠지만.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부녀 때문에 속 썩는 은정에게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고 싶다. 지금도 많은 추억을 나열했지만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나 지 않을 만큼 수많은 추억들이 있다. 그 시절의 성욱과 은정 과 내가 기억이 난다. 성욱과 은정은 젊었고 나는 어렸다. 다 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지만 그 시간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같이 살아가고 있다. 한순간도 잊은 적 없이. 2009년에 성욱의 블로그에 올려놨던 하늘 사진을 지금의 풍경과 비교하며 혼자 탄식하기도 한다. 2009년 나의 생일 때 선물 받았던 오르골을 침대 곁에 두고 자기 전 돌려보며 9살의 생일날을 떠올린다. 성욱의 전각 작품들을 둘러보며 타투로 내 팔에 새기고 싶다고 생각한다. 매일 먹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에 보이차를 마시며 그때 마셨던 맛과 향을 더듬는다. 비가 오는 날에 작업실에서 김광석 노래와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을 것이라던 성욱 의 말을 기억하며, 비가 오는 날 블루투스 스피커로 김광석 노래를 틀고 센치함에 잠기기도 한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 지만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그 렇다. 얼마 전 읽은 책에는 “사람의 생각은 과거와 미래로만 이루어져 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사람들의 생 각이 과거의 후회와 돌아봄,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이루어져 있어 현재를 살기에는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과 거에 대한 추억을 거름 삼아 현재의 동력으로 쓰고, 과거에 대한 후회를 발판 삼아 좀 더 높은 곳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산의 작업실에서 지내던 시간처럼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처럼 살기 위해 미래의 나를 계획하는 아이러니함을 보내고 있다.
(2022년에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