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주 May 05. 2024

축구와 갯벌- 어린이와 함께라서

 아들을 키우면서 '네 덕분에 이런 것도 해보는구나' 싶은 순간들이 많다. (물론 그 뒤에 한숨이 붙기도 한다.)

 나는 2002년 월드컵도 대충 봤고, 아는 축구선수 이름도 한줌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축구 좋아하는 아들 때문에/덕분에 매주 축구수업을 보러 가고, 아이가 하는 축구게임 이야기를 계속 듣고, 축구선수 이름맞추기를 강요당하며 '골때리는 그녀들'과 '뭉쳐야 찬다'를 시청하면서 본의 아니게 축구에 조금 눈과 귀가 열렸다. 관심이 생겼다고까지 할 수는 없고, 그냥 보다보면 재밌기도 한 정도.

 그리고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어제 5월 4일, 인생 처음으로 축구 직관을 갔다. 사실 작년부터 아이가 경기장에서 축구를 보고 싶다고 여러번 말했었는데 워낙 내 취향이 아니라 대충 뭉갰었더랬다. 그런데 이번엔 경기 날짜가 마침 어린이날 선물스럽기도 하고, 아들 데리고 종종 경기를 보러 다니는 동네 친한 엄마들이 가보면 생각보다 재밌다며 등 떠미는 데 힘입어 드디어 표를 샀다.

 어제 최고기온 28도, 땡볕. 서측 관람석에 앉으면 그늘인데 나는 아는 사람이 취소할 표를 샀더니 동측이었고, 서측과 동측은 가격 차이도 꽤 났다. 어른 둘, 아이 하나 기준으로 동측이면 49000원, 서측이면 72000원인데 날씨와 그늘 정보를 알게 된 뒤 수수료를 내더라도 새로 예매할까 하고 보니 서측이든 동측이든 2층에 남는 자리가 없었다. 티켓팅을 오픈 때 딱 들어가서 해야되는 줄도 몰랐던 나로서는 취소표를 못받았으면 2층 지정석을 아예 못 잡았을 것 같다. 당일에 주차도 너무 힘들었고, 남편과 나는 계속 '축구 보러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어?' 라며 놀라워했다. 어제가 올해 케이리그 및 국내 프로스포츠 최대,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관중 성적이었다고 한다.

 너무 더울 것 같은데 어떡하지, 라며 걱정하는 나에게 아들이 아주 단호하게 한마디 했다.

 "엄마,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 시간동안 뛰는 선수들을 생각해봐."

 참 나. 언제부터 남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했다고.

 

 그렇게 확신없이 얼레벌레 보러 간 경기는, 100% 집중이 되진 않았지만 지루하지도 않았다. 사실 의외로 시간이 빨리 가고 재밌었다. 또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너무 덥고 뜨거워서 '다음에 온다면 저녁에 오든지 서측에 가리라'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남편과 스페인에 여행갔다가 투우를 본 적이 있는데 좌석이 SOL(태양)과 UMBRE(그늘)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땐 경기장과의 거리나 좌석의 편안함 따위 상관없이 오직 태양이냐 그늘이냐의 차이로 가격이 최대 열배까지 차이가 났다. 스페인의 5월 태양을 쨍쨍 받는 SOL 자리에서 투우를 보면서 와.... 나중에 또 온다면 돈 더 내고 UMBRE에 앉든지 안 보든지 해야겠다 했는데 십년이 지나서 또 땡볕 관람석에 앉고 말았다. 긴 바지를 입고 갔는데도 다리가 너무 뜨거워서 위에 가디건을 덮어야 했다. 

 

 축구경기 관람만으로는 어린이날 연휴가 끝나지 않는다. 아직 연휴 첫날의 해가 밝다. 축구경기가 끝나고 이제는 차에 올라타 바다로 향했다. 미리 대부도에 숙소를 잡아놨었는데, 마침 물때가 잘 맞아서 간조가 밤 8시라 축구 끝나고 이동해서 갯벌 조개잡이가 가능했다. 

 전에도 아이랑 조개잡기를 몇 번 해봤지만, 이 나이에 캄캄한 갯벌에서 후레시를 켜고 조개를 잡는 건 정말 생각 안해본 장면이다. 그런데 자연에서 단순 반복노동을 하며 수확물을 채취하는 건 더없이 명쾌하고 고뇌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서 하다보면 넋놓고 빨려든다. 요새 자다 깼을 때 문득문득 일 생각이 떠오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중이라 이렇게 뭔가에 집중하느라 번뇌를 잊을 수 있는 시간들이 좋다. 원래 몰입이 인간을 즐겁게 하니까.

 그렇게 한시간 넘게 작업해서 동죽을 잔뜩 잡고 아들의 손바닥만한 상합도 하나 잡았다. 조그만 가재처럼 생긴 쏙도 잡아서 아주 신이 났다. 결국 숙소에 처음 발 들인 시간이 밤 11시였다. 아이 성화에 해감까지 세팅해두니 열두시가 넘었다. 나는 유럽여행도 이렇게는 안 다니는 사람인데 정말 빽빽한 하루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 개인으로서는 평생 관심가질 일이 없었던 것들-축구, 곤충채집, 표본만들기, 게잡기, 조개잡기,...-을 경험하고 때떄로 즐기기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이 확장되는 즐거움을 느낀다. 


 "네 덕분에 엄마가 축구장을 다 와보네."

 한참 전부터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가질 일이 별로 없고, 관심이 생겨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가 내키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하며, 사랑이 있기에 여러 일들에 처음이라는 장벽을 깰 수 있고 그렇기에 다른 즐거움과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나 사춘기인가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