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서 발리를 보면 부채꼴 모양으로 아래는 좁고 위로 갈수록(그리고 서쪽으로는 더더욱) 넓게 펼쳐진 모양인데, 공항이 꽤나 남쪽에 있고, 주요 관광지들도 모두 중부 아래쪽으로 위치해 있다. 그 위로는 대부분이 산지이고, 우붓이 그 산림 지역 중에서는 초입에 해당한다. 그래서 발리를 세 번 방문했지만 사실 그 섬의 아주 일부만을 가보았을 뿐이다.
우리는 발리 덴파사르 공항에서 일단 우붓으로 올라가 여행을 시작하고, 이후 점점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선을 짰다.
그래서 여행 열흘째에 도착한 사누르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접했다. 우붓이 여행지로서 사누르보다 훨씬 명성 있는 곳이지만, 사누르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진 바닷가 도시 특유의 그 번화하고 풍요로운 분위기에는 확실히 좀 더 관광지다운 안정감이 있었다. 발리의 남부 지역에는 사누르, 짱구, 꾸따, 누사두아 등 다양한 바닷가 마을들이 있고 그중 사누르는 '호주 및 유럽의 은퇴자들과 가족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 심심하고 평화로운 곳'이라는 평이 많았다. 그래서 이곳을 택했고, 나도 그 평에 동의한다.
사누르 비치는 모래사장이 길게 이어져서 위로는 신두 비치까지 이르는데, 자전거를 빌려 타고 아이와 함께 슬렁슬렁 길을 따라가다가 중간에 거북이 방생장도 들리고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사 먹으며 잠시 쉬다 하다 보면 2시간 정도는 금세 지나갔다. 울퉁불퉁하고 잠시 끊기기도 하지만 우붓에 비하면 정말 굉장히 인간과 자전거를 배려한 길이다.
우리 가족은 5성급 호텔 중 보급형이라 해야 할까,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넓은 수영장과 부지를 갖추고 전용비치가 있으며 (실제 활용할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아플 때 방으로 의사를 보내줄 수 있는 시설과 시스템을 갖춘 호텔에 머물렀다. 해변의 그 호텔에는 호주에서 온 노년의 숙박객이 많았는데 내가 예약사이트에서 본 후기에도 '우리 부부는 이번에도 한 달간 머물렀습니다. ~' 이런 식의 호주 국적 여행객의 글이 꽤 많았다.
아침 7시가 풀장의 정식 오픈시간인데, 6시 반쯤 되면 이미 여행자라기보다는 거주자 같은 서양인 노인 몇 분이 수영장의 썬베드를 스스로 세팅하고 짐을 푼 뒤 수영을 시작한다. 이 부지런한 분들은 일행과 노닥거리거나 하는 일 없이 스노클링 마스크를 끼고 꾸준히 쉬지 않고 넓은 풀장을 가로지른다. 어떤 할머니는 휠체어를 탄 채로 수영장 근처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휠체어 없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비행기를 타고 섬으로 여행을 온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는데, 생각해 보면 나의 편견이다. 우리 방 테라스에 앉아있다 보면 다른 테라스에서 맥주병을 놓고 웃고 떠드는 노년의 친구 내지 부부 팀들도 많이 보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꼭 물가와 연동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기준 삼아 비교해 보자면 인도네시아 5,271달러, 대한민국 34,165달러, 호주 66,589달러다(2024년 4월 IMF). 가서 겪어보니 내가 다녔던 발리의 식당들은 생각보다 가격이 높았지만 호텔 숙박비나 인건비가 확실히 싸고 외식비도 한국에 비하면 약간은 낮으니 호주인들에게는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는 가격이리라 싶다. 그러니 요양원에서 물리치료받을 바엔 발리에 와서 따스하고 쾌적한 날씨의 축복 아래 바닷가 수영장에서 무한 잠영을 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대안일 것 같다.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게다가 발리는 동남아 관광지의 일반적인 여러 장점(아름다운 풍광, 인류에게 우호적인 날씨, 저렴한 물가, 만족스러운 숙박시설)에 더해서 온갖 국적의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점, 요가 수련원, 래프팅에서 트래킹까지 다양한 액티비티, 쾌적하고 넓은 마트들, 그리고 '제조업이 아예 발달하지 않은 데서 오는 쾌적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아이 엄마로서는 온갖 동물 관련 활동이 가능한 것도 엄청난 장점이다. '다친 돌고래들을 보호하다 바다로 돌려보내는 임시시설인데 돌고래와 함께 헤엄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식으로 혹시 내가 동물 학대에 참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을 떨칠 수 있는 스토리를 제공하는 시설들이다.
사누르에서 지내는 약 2주간 매일 그런 (아마도) 은퇴자들을 보면서 역시 노년에는 나도 저리 보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물가가 저렴하고 날씨가 온화한, 힙하지 않은 바닷가 마을에서.
내가 60대쯤에 한국의 경제력과 나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 모르지만, 그때 나의 능력 내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지역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항상 여유와 편안함에 절박한 편이라 어느 순간부터 문득 혹시 나는 빨리 늙고 싶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든다. 경쟁의 격한 흐름에서 발을 빼는 것이 순리로 보이는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도 그 흐름에 너무 몸을 담그지 않으려고, 하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일정한 지위는 유지하려고, 그러면서 나와 가족을 위한 에너지와 시간은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그 균형점을 찾기 위한 끝없는 발버둥 자체가 때로 나를 지치게 하지만 그럭저럭 굴러가는 현실에 대체로 감사하려 한다.
영일만 유전도 흥하고, 출산율도 다시 흥하고, AI든 전기차든 차세대 대표 산업이 흥해서 우리나라 소득 수준이 올라가기 바란다. 내가 그 사회 안에서 대략 제 몫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 노년에 따뜻한 바닷가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 데 충분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