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일하기 싫다. 복직 후 시시때때로 머릿속에서 이 대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싫은 마음은 일의 막간, 혹은 퇴근길, 또는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좀 더 고개를 드는 생각이고 실제 몰입해서 일을 하는 중에는 가타부타 생각 없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불현듯 업무 생각이 나면서 답답하다가 막상 출근해서 일의 실체를 마주하고 할 일을 하노라면 차라리 안심이 된달까. 어떤 문제에 대해 지레 겁을 먹고 있다가 실제로 현실로 닥치면 차라리 포기하고 마음이 편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래도, 아무튼, 일하기 싫다.
지금 내가 하는 업무의 특성-매뉴얼이 부재하거나 매뉴얼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외부 요인에 의해 갑자기 드롭되거나 갑자기 추진되는 일들이 많고, 업무 상대방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고 -들이 참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업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상황을 잘 읽어내고 여러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해결책을 풀어내야 하고, 매뉴얼에 없이 자기 판단대로 일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고, 국외 파트너와 일한다는 점 등등. 그러나 이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
갖가지 이유로 내가 불만과 투덜거림을 쏟아낼 때면 - 왜 다 정해진 거 회신 좀 달라는데 2달이 걸려도 안 오지? 가이드라인이랑 규정 다 뒤져도 정해진 게 없던데 그냥 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게 왜 근본 없이 그쪽 매뉴얼에 들어가 있어? 상대방이 할 생각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연내에 내보내? 컨퍼런스 콜 하자고 해서 콜 열었더니 영어를 못한대! 이게 뭐야? 등등- 부처 같은 미소를 띠고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힘들지 않아? 그냥 해야지' 라며 호호 웃던 같은 부서 동기는 큰 병에 걸려 병가에 들어갔다. 업무와의 인과관계는 명확히 밝힐 수 없지만, 그 부처 같은 마음으로 감내해 낸 업무들이 기어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 게 틀림없다는 게 우리 부서 모두의 생각이다. 그 동기의 경우엔 유난히 지저분한 일이 유난히 몰려서 누가 봐도 무리다 싶은 상황이었는데도 내가 100만큼 투덜거릴 때 5도 표현을 안 했더랬다.
토할 것 같던 복직 전의 막연한 두려움, 복직 후 구체적인 막막함을 거쳐 이제 대체로 일상적인 수준의 스트레스 속에 하루하루를 해나가는 근로 생활에 다시 적응하긴 했다. 다행히도 부서 사람들이 다 좋고 나의 수많은 질문에도 싫은 내색 없이 잘 도와줘서(그럼 내가 빌런인가) 업무 자체의 어려움, 양육과 가사를 병행하는 어려움에도 사직서를 품지 않을 만큼 적응할 수 있었다.
근데 아무튼 일하기 싫다. 일 자체를 안 하고 싶다기보다는 휴일에 일어났는데 막혀있는 업무 생각이 나고, 샤워하면서 나도 모르게 작성할 문서를 머릿속으로 점검하고, 쌀 씻다가 내가 보낸 레터를 곰곰이 되짚어보게 되는 게 싫다. 고객이 저금하려고 들고 온 돈을 세다가도 영업 종료시간이 되면 내일 다시 오라며 퇴근한다는 호주 은행원처럼 일하고 싶다. 그게 문화의 차이인지, 자원부국과 빈국의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노동을 강제해서 자연스러운 생산량을 초과하는 성과를 내게끔 하는 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중요한 요소였다. 기원전 약 2천년 우르 왕조에서는 세심한 장부기록을 통해 노동자 감독관이 매달 30일 치 노동을 노동자에게 강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면 국가에 그 손해분을 지급했어야 한다고 한다. 국가에 내야 할 그 손해분을 메꾸지 못한 채로 죽으면 가족들이 빚을 상속했다. 책에서 이 내용을 보며 어쩌면 그로부터 4천년이 지난 지금 세상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방식으로 노동을 강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매달 30일 치 노동이라는 투입 목표 대신, '전년 대비 00% 매출 증가' 라든지 '경쟁사 대비 앞선 신제품 출시'라든지 '비용 00% 감소' 등의 성과 목표를 걸어 놓고 아무튼 해내라고 하는 것. 그 결과는 결국 금전으로 환산되고, 노동자 감독관이 적자를 보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직관리자의 총급여는 성과급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니 결국 비슷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일하는 시간이나 행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무리한 수준으로 설정된 목표, 그걸 이루기 위해 요구되는 (경우에 따라) 무리한 노동량, 긴장된 분위기, 압박감, 그에 따른 육체적 고됨과 정신적 피로... 이런 것들이 이 부유한 세상에서도 4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조이고 강제해서 내 마음의 저변에 '일하기 싫다'는 생각을 시시때때로 불러일으키는 거 아닐까. 물론 일이라는 것에 목표가 없거나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매달 30일치 노동'이 아니라 '매달 20일치 노동'이라면 훨씬 살만하겠지.
일을 안 하는 시간이 아쉽고, 일이 너무 재밌고,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일과 관련된 공부를 해서 더 깊이 배우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삶이 궁금하다. 그렇게 되면 매달 30일치 노동에 해당하는 강제적인 목표들이 온전히 내 것으로 여겨지기에 일에 따르는 스트레스나 마모를 기꺼이 끌어안고, 자아 실현의 과정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