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영감
1년에 한 번 연말이 되면 수강생분들과 함께 협회에서 주최하는 정기회원전에 참여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영문캘리그라피 작품으로 함께 했다. 도록작업을 위해서는 10월 초에 작품을 마감해서 넘겨야 한다. 뭐 그리 대단한 작가도 아니면서 해마다 여름부터 작품에 대한 고민으로 한숨을 달고 산다. 수강생분들 작품을 먼저 피드백주고 한분씩 완성되어 갈 때마다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나는 어쩌지? 큰일 났다. 어뜩하지? 작품 컨셉도 못 잡았는데 큰일이네. 그냥 전시 빠질까?' 6개의 작품이 완성되는 동안 작품 생각만 해도 답은 없었다.
'영감아 떠올라라. 과연 영감이 있긴 한 걸까?' 영감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술가는 아닌 게 분명해. 작가는 무슨. 영감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만나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나는 그냥 글씨 쓰는 사람이야.' 올해도 혼자 고민하다 빠른 포기를 하며 작년에 했던 작품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바꿔서 글씨로만 작품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의 짐이 조금 가벼워진다.
여름의 끝자락이던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업실에 나가는 길이었다. 작업실과 집은 걸어서 9분 거리. 아파트 1층에서부터 단지를 빠져나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6분. 산책로 조경이 잘 되어 있는 단지를 걸어 나가는 길은 계절의 변화를 즐기며 사색을 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아주 조금 아쉬운 듯한 출근길. 절대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 힐링코스다. 단지를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 정원을 향해 오른쪽으로 돌아선 순간이었다. 애매한 거리에 있는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가 깜박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뛰어? 말아?' 고민이랄 것도 없이 나의 선택은 늘 한결같다. (답정녀면서 고민은 왜 하는 건지) '됐어. 뭘 뛰어. 다음신호까지 꽃구경이나 하자.' 원래도 천천히 걷던 걸음은 거의 집에 가기 싫은 아이의 발걸음처럼 더디게 이어졌다.
안 그래도 영감을 못 만나 심란한데 여름의 끝자락에 가을의 문턱이라 그런지 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기 싫어하는 여름의 짙은 초록과 가을의 존재를 알리며 붉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만 눈에 들어온다. 머리 위 나뭇잎에서 시작된 시선이 신발 앞코에 닿은 토끼풀밭에 멈춘다. 습관적으로 네 잎클로버를 찾는 눈동자가 분주하다. 이리저리 바빠진 시선에 문득 흔해빠진 글귀가 스쳐 지나갔다.
세 잎클로버는 행복을, 네 잎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한다는 누구나 다 아는 그 이야기. 행운을 찾기 위해 무수히 많은 행복을 발로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글이 머릿속에 지나간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토끼풀을 보면 의지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숨어있는 네 잎클로버를 찾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내가 무슨 작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너무나 뻔한 행동에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만난 순간 드디어 나에게도 번쩍하고 영감이 나타났다.
맑은 수채물감으로 푸른 정원을 표현하고 그 속에 행운을 숨겨야겠다. 행복 속에 행운을 숨겨야겠다는 생각하고 작품의 전체적이 이미지가 그려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영감님인가 싶은 마음에 보행자 신호를 한번 더 놓치고도 해실거리며 작업실로 향했다. 초안을 잡고 단숨에 완성된 작품. 그런데 너무 감췄나? 행운이 생각보다 어둡다. 숨긴 건 작가의 의도라고 하지만 찾는 이들에게 너무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은 양가감정이라니. 작품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빠져있는데 좋아하는 햇살이 작품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저 햇살에 행운이 반짝 빛나면 사람들이 너무 힘들지 않게 행운을 찾을 텐데. 행복을 망가트리지 않고 원하는 행운을 찾으면 좋겠다.' 첫 만남을 그리 비싸게 굴던 영감은 그날 한번 더 찾아와 주었다. 소장하고 있던 백조브랜드의 큐빅을 조심스레 올려 반짝이는 행운을 만들었다. 전시장을 찾은 많은 분들이 조명을 받으며 푸른 행복 속에서 빛나는 행운을 발견하기를 소망했다.
이젠 나도 진짜 작가라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으로 영감을 만나 시도한 작품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떠나 곧 내 품을 떠난다. 그곳에서 반짝이는 행운을 쏟아내기를 바란다.
예술은 손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가 경험한 감정의 전달이다. _레프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