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이돌에게 관심 없어?”
“네, 관심 없어요. 아이돌 좋아하면 앨범 사느라 돈 많이 쓰던 데. 거기에 돈 쓰는 게 아까워요.”
‘하늘 아래 같은 콘서트는 없다’라며 셋리스트가 같은 콘서트를 이틀 연속 가고,
팬사인회 응모를 위해 앨범을 여러 개 사는 흔한 아이돌 덕후가 될 줄 꿈에도 몰랐던 내가 했던 말이다.
덕질 세계에는 덕통사고라는 말이 존재한다.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처럼, 어떤 일을 계기로 누군가에게 한 순간에 반해
깊이 좋아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덕후라면 누구나 꼭 한 번은 겪는 덕통사고의 순간을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경험했다.
당시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패밀리가 떴다’를 보는데, 시간이 갈수록 유독 한 멤버가
계속 눈에 들어오고 그가 나오면 활짝 웃는 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멤버는 바로 그룹 빅뱅의 대성이었다. 다른 아이돌들처럼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시골 똥강아지처럼 형과 누나들을 촐랑거리며 따라다니는 모습이 꽤 귀여워 보였다.
언제 봐도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게 웃고 있는 눈, 애교 있는 말투와 행동 그리고 살짝 모자라 보이지만 본업인 노래와 춤만큼은 빼지 않고 잘하던 모습.
대성의 매력적인 점들이 점점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순간, 내가 그에게 반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일주일 내내 인터넷으로 대성의 사진과
영상을 찾아봤고, 자연스럽게 빅뱅의 다른 멤버들에게도 빠지게 됐다.
노래를 들으면 지금 이 부분이 누구 파트인지
알게 될 정도로 빅뱅의 전곡을 반복 재생하고
그들이 나오는 모든 영상을 찾아보며 광대 아프게 웃던 그때 나에게는 빅뱅 팬 ‘VIP’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겨났다.
빅뱅을 좋아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족, 친구가 아닌 생판 남인 사람을 이렇게 열렬히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전까진 내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최고치가 10 정도였다면 빅뱅을 좋아하고 나서부턴
갑자기 100으로 레벨 업 된 느낌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빅뱅은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라’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당시엔 그들이 나를 아는 것보다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내가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꿈을 응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여러가지 작고 큰 논란이 터질 때면 나 역시 사람들의 악플에 상처받았지만, 내 상처를 돌보기 보단
논란에 휩싸인 멤버들을 더 걱정하며 욕하는 사람들 앞에서 피의 쉴드를 치기 바빴다.
이렇게 고난과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간 우리 사이는 더욱더 끈끈해졌을 거라 믿었고 빅뱅을 향한
내 사랑은 이대로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에서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인터넷 창을 뜨겁게 만드는 이슈보다 ‘차라리 군대나
갔다 오지!’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긴 공백기가 나를 지치게 했다.
빅뱅에만 쏟던 나의 애정을 샤이니, 비스트 등 다른 아이돌에게 조금씩 주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예전의 순수한 마음보단 습관적으로 그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때 대한민국을 한참 떠들썩하게 만든 승리의 버닝썬 스캔들이 터졌다. 기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접하게 된 순간, 난 단 한 톨의 미련 없이 7년간의 첫사랑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분명 한때는 내 자부심이었는데 지금은 어디 가서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창피한 사람이 되다니.
그때 이후로 평생 들을 줄 알았던 빅뱅의 노래들은 죄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삭제했고 다시는
찾아 듣지 않는다. 한때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지금은 그때 일들이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비록 내 첫 덕질은 상처와 분노로 얼룩졌고 나의 가장 큰 정체성 중 하나였던 빅뱅 팬 ‘VIP’를
잃었지만 그보다 더 큰 ‘덕후’ 정체성을 얻게 됐다. 누군가를 가슴 벅차게 좋아하고 진심을
다해 응원한다는 건 어쩌면 나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갈수록 혐오와 비방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조건 없이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 덕후 기질은
앞으로 다른 어떤 능력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내가 아낌없이 사랑을
줄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내가 가장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시는 연예인을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느닷없이 찾아오는 덕통사고에는 당할 도리가 없어
지금은 밴드 데이식스를 응원 중이다. 이외에도 음악, 미술, 책, 영화 등 여러 분야를 깊이 탐색하고 좋아하며 나의 덕후 정체성을 점점 더 확립해 나가고 있다.
내가 애정을 갖고 좋아하는 것들은 나만의 취향과 감성을 만들어줬고 무엇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큰 이유가 되어줬다. 비록 빅뱅처럼 상처로 남는 덕질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앞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열정 넘치게 무언가를 사랑할 줄 아는 덕후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