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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더잠 Mar 08. 2021

[더잠 여성제 본선 진출작] 정수한

정수한_코르셋

[2021 더잠 여성제 본선 진출작] 정수한_코르셋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많은 일상이 무너졌다. 재미를 붙여 꾸준히 가던 수영도, 친구들과 함께 즐겼던 여러 취미생활도 없어진 지 오래다. 평소에 온 가족이 모이면 웬일이냐고 한 마디씩 주고받았던 상황이 일상이 되어서 북적북적하다. 언니랑 하나 둘 시켜먹었던 배달의 빈도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뒤바뀐 밤낮에 아침을 거르고, 늦은 점심이 되어서야 비척비척 일어나 배달 음식을 시켰다. 그 이후에 디저트라고 또 단 음식을 시켜먹고 밤이 되면 야식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배달 음식을 함께 먹었다. 언니가 배달 어플의 VIP 이용자가 되었을 때에도 웃고 넘어갔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점점 늘어나고, 우연히 눈에 띈 체중계로 잰 내 체중은 정말, 엄청나게 바뀌었다. 체중을 알고 나서야 몸을 씻을 때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불어난 살을 보기 싫어 습기 뒤에 스스로를 숨긴 게 아니었나, 싶다. 살이 붙은 허벅지가 서로 부딪히는 감각이 끈적했고, 살을 도려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팔뚝, 허벅지, 어깨, 배 등 튼살이 없는 곳을 세는 게 더 빨랐다. 살이 찌면 지방층이 두꺼워져 표피가 팽팽해진다. 그런 자극을 받은 피부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튼살이다. 튼살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이따금씩 그것들을 긁었다. 긁어냈다. 내 몸에서 없어졌으면 했다. 튼살만 키워드를 입력하면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튼살 없애는 법’, ‘튼살 크림’ 이다. 누구도 튼살의 원인이나 이런 부가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없어져야 하는 것’이 내 몸에 있다는 사실은 내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원인 또한-내가 살이 쪘다는 것이었고, 혐오스러웠다. 


살이 찌면 자연스레 몸 곳곳에 지방이 늘게 된다. 나 같은 경우 가장 티나는 곳은 가슴이었다. 살이 가슴과 하체를 기반으로 해서 몸 곳곳에 붙기 시작했다. 여성복을 입곤 하면 옷 태를 가장 잘 살려준다는 가슴에 살이 가장 먼저 붙는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혐오했던 여성성의 상징이 부러운 그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저 여성성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본인의 빈약한 부분만을 애써 곱씹고, 곱씹으며 살아남고자 했을 뿐 이다. ‘꽉 찬 0컵’ ‘옷 이쁘게 입는 신체조건’ 이런 키워드가 붙은 인터넷 광고는 수없이 많지만, ‘편한 속옷’ ‘여남공용 쇼핑몰’ 은 턱없이 드물다. ‘남녀공용’ 이면 모를까. 


사회가 만들어낸 ‘예쁜’ ‘여성적인’ 것에 스스로를 맞추지 못하면 자괴감을 느낀다. 내가 못생긴 편인가? 뚱뚱한가? 다리가 두꺼워 보일까?? 이런 단순한 고민이 나아가 고질적인 자기혐오를 생산한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는가? 놀랍게도 내가 그랬고, 내 주변이 그랬고, 아마 한국의 모든 여성이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잘못이 없고 스스로의 몸을 재단하게 만든 사회 탓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모든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긍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공모전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몸을 싫어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본인을 구겨 넣으려고 하면 그 순간부터 여성의 삶은 피곤해진다. 정말 창살 없는 감옥이고 목줄 없는 코끼리 신세를 자처하는 건데, 아마 이 비유도 덩치 큰 코끼리를 예시로 들어서 고까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최소 영양소도 채우지 못하고 무리한 운동만 해가면서 만든 몸이 누구한테 사랑받을까? 모두에게. 본인 스스로한테만 사랑받지 못하는데, 모두에게 사랑받는 게 정말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본인의 신체를 깎아내리고 부끄러워하고 또 숨겨야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야 기존의 여성 속옷이 건강에 좋지 않으며 기능 또한 남성 속옷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것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능’에 집중하지 않고 여성을 성상품화 하고자 하는 것에만 집중한 속옷은 누가 살까 싶기도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사랑받는 신체조건처럼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한 스스로를 꾸미는 도구의 일종으로 인기가 많다.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고 지나치게 편파적인 현상이지만, ‘이벤트 속옷’ ‘여자라면 한 번쯤’ ‘이라는 여성혐오적 표현이 일상이 되어버렸기에 이를 비판하는 점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우리의 몸을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나를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얇디 얇은 천 속에 숨겨진 차가운 와이어가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것에는 질린 지 오래다. ‘편한’ 속옷. 정말 기능만을 목표로 두고 만들어진 여성용 속옷이 나오기를 고대하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편하게 하면, ‘예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저 편하게. 건강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정말 건강해질 것이다. 이따금씩 습기가 가득한 화장실에서 거울의 습기를 물로 닦아낸다. 이게 내 몸이고, 건강하고 편하고 자연스러운 내 몸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자 엄숙한 의식이다. 이 의식을 대표하는 노래는 안예은 님의 ‘사람들은’이라는 노래이다. ‘어느새 여름이 돼버렸고 더위에 눈앞이 흐려져서 차라리 지난 겨울을 그리워하기도 해’ 분명 숨을 쉬기 위해 눈을 뜨게 되었는데, 되려 보지 못했던 미세먼지들이 목구멍에 달라붙은 것이 혐오스러울 지경이다. 아마 ‘각성’ 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그 자체로만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보호막으로 여겼던 모든 환경이 단비를 막는 매연이었다는 것을. 차라리 몰랐으면 싶다가도 절대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선택 여럿이 모여 우리의 힘을 키운다고 할 수 있다. 


애써 스스로의 몸을 긍정해나가는 과정 또한 서글프다. 부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러한 과정을 밟을까 싶으면서도 나아가는 것 같아 기쁘다. 난 어렸을 때부터 살이 찌면 가슴으로 제일 가는 이 특성이 싫었다. 달리기를 좋아하던 내가 마음껏 달리는 것을 방해하는 아주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방 덩어리가 운동에 방해되는 건 사실이지만 타인에 의해 재단되고 있다는 점이 제일 싫었다. 이젠 이 지방 덩어리를,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고자 한다. 모든 것을 긍정하고, 내 몸을 긍정하면서 앞으로도 나는 이 지방 덩어리와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아마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지방 덩어리와 함께 운동하기위한 스포츠웨어나, 편한 속옷을 몇벌 구매해야겠지만 사회의 코르셋보다는 행복할 길이기에 그저 즐거울 뿐이다. 차가운 와이어와 함께하는 운동에는 이미 이골이 났다. 움직이다가 찔릴 물체도, 품평하고자 따라붙는 시선도 없으니 정말 운동에만 전념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 몸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면, 그저 편한 것만 생각했으면 한다. 스스로의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며, 그저 편하고 건강에 좋은 속옷을 착용하자는 게 그렇게나 불가능하게 여겨질까?  타인에 의해 재단되는 삶에서 벗어나자는 그 외침이 그렇게나 듣기 싫은 소리일까? 이와 관련해서, 내가 주변 친구들에게 흔히 던지는 예시는 ‘무인도’이다. 무인도에 떨어져 나 밖에 있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예쁜’ 가슴을 유지하기 위해서 딱딱하고 차가운 와이어가 든 속옷을 선택할까, 아니면 활동에 편해 이리저리 둘러보고 또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편한 속옷을 고를까? 이 질문이 편파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이 사회도 속옷에 레이스와 리본을 달아가며 여성을 성 상품화 시켰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아무튼, 본인의 일상이 사회에서 각인시킨 미를 기준으로 돌아갔으면 하는지, 아니면 본인들의 편안함을 기준으로 돌아갔으면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특정 성별에 비해서, 여성은 요구받아야 할 것이 많았기에 선택의 폭 또한 좁았다. 여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참정권을 얻어낸 것처럼,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많기에 그 과정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편하고, 스스로를 위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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