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성인 교육 도메인에서 기획 일을 하고 있다. 모든 상품은 고객이 상품을 경험할 때부터 의미가 생기기에, 기획자는 고객이 내 상품을 경험하게 만들어야 한다. 교육 상품도 마찬가지인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고객이 공부를 해야 한다. 이 말인즉, 교육 상품의 담당자는 고객을 공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균 5% 수준인 온라인 강의 완강률을 100%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있는 고객을 책상 앞에 앉게 하고 고객이 강의에서 배운 내용을 실생활이나 직장에서 스스로 활용하게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한 번에 큰 성취를 달성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니, 작은 성취의 누적을 통해 고객이 끝까지 공부할 수 있게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 적합한 방법이 게이미피케이션*이라고 생각하여 기획안을 작성하여 대표님께 가져갔고, 얄짤없이 반려당했다.
*게이미피케이션 gamification : game + fication의 신조어로,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션, 보상, 경쟁 등의 요소를 다른 분야에 접목하여 유저의 참여 및 행동을 이끌어 내는 기법
필자가 얼토당토않는 말을 한 건 아니다. 교육 상품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상품이라(다들 놀고 싶지 누가 공부를 하고 싶을까) 고객을 공부하게 만들기 위해 이전에 하지 않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는 것보다 이미 익숙한 방식으로 고객을 설득하는 것이 유효하고, 여기에 게이미피케이션은 적합한 카드였다고 생각했다.
우린 어렸을 때 한 번쯤 포도알을 모아봤고, 게임을 하면서 미션을 깨고 내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고 보상을 받아봤으며, 태권도 학원에서 띠 승급을 하거나 피아노 학원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성장의 기쁨을 느끼지 않았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반려당할만했다고 생각한다.
교육이 상품으로써, 나아가 비즈니스로써 의미가 있으려면 누구나, 적은 노력으로, 본인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돼야 한다. 여기서 '적은 노력으로'라는 키워드에 게이미피케이션이 부적합했다.
게이미피케이션의 작동 원리는 재미의 누적 및 심화를 통해 고객이 더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 상품을 찾는 고객은 본인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애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을 했고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게이미피케이션과 코드가 맞지 않았다.
필자의 교육 상품은(아마도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 상품은) 고객을 계속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상품이 아니라, 고객을 최대한 빠르게 졸업시켜 내보내야 하는 상품이다. 재수생을 삼수생으로 만드는 것보다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옳듯이 말이다. 고객을 빠르게 졸업시켜야 하는 미션과 게이미피케이션은 상응하지 않았다.
게이미피케이션은 고객이 상품을 계속 경험하게 만들기에 용이하다. 유아용 교육 상품은 이 목적에 아주 적합하나, 필자의 교육 상품은 하루라도 빨리 고객의 목표를 달성시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고객의 outcomes를 통해 재구매, 신규 유입 등이 발생하는 비즈니스기 때문이다. 로또 판매점 중 1등 배출을 많이 한 곳이 명당이 되어 사람이 몰리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가장 먼저 모아야 하는 고객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필자의 교육 상품으로 본인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지렛대 삼아 본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 상품(또는 공부)이라는 수단을 채택할 사람을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필자가 해야 하는 일은 그럴듯한 게이미피케이션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고, 고객이 교육 상품 및 공부라는 수단을 채택해야 하는 뾰족한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대표님도 우리가 먼저 모아야 할 사람들을 다 모은 다음에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해 다른 일을 해보자고 말씀하셨다.
말콤 노울즈의 안드라고지(Andragogy, 성인교육학)에 따르면, 성인은 실제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습의 필요성을 느낄 때 기꺼이 학습하고 성과 중심적인 학습 지향성을 보인다고 한다. 쉽게 말해 오늘 배운 것을 내일 써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업자로서 필자가 느끼기에 고객 입장에서 '내일 써먹을 것'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커지는 것 같다. 공부라는 수단을 통해 면접의 기회를 얻는 것보다 당장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원하고, 영어 실력을 한 단계씩 향상시키기보다 지금 바로 원어민 수준으로 말하길 원하는 식이다. 이와 같은 고객의 변화에 게이미피케이션이 적합한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교육 도메인보다 콘텐츠 기반의 비즈니스 또는 커머스 도메인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닐까. 오늘의 이야기 끝.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이 고객을 공부시키는 방법에 대한 글이라면, 아래 글은 교육 상품의 포맷에 대한 글입니다. 교육 상품의 포맷에 따라 고객의 행태가 달라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함께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