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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Mar 23. 2024

오메, 동백이 피었어야

 오메, 동백이 피었어야

                             유용수


  할머니 마당에는 멍석이 깔렸고 나락을 탈곡했고 

토란대와 고추가 꾸덕꾸덕 말라갔고 서리태가 가을볕에

몸살을 앓았고 산밭 참깨가 부석거렸고 농악대가 지신밟기를 했고

아버지가 혼례를 치렸고 나는 걸음마를 배웠고 할아버지 할머니 꽃상여가 떠났다


  어머니가 물려받은 마당으로

  아버지가 흰 고무신 신고 마지막 밟은 날


  허름한 숫돌은 늙은 발소리를 들었고 공이 잃은 돌절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쉬는 숨소리를 들었고 담장 밑 봉숭아는 웅크린 채 꽃잎을 떨구었고 헛청에 걸어둔 낡은 삽 한 자루, 굽은 어깨를 보았고 장독대 옆 흙 담장을 기댄 헌걸찬 동백도 보았다

  오월 제삿날 아침

  수척해진 구순 어머니 밭은기침 소리에

  동백은 가늘어진 기억 붙들고 시뻘건 꽃 한 송이를 피웠다

 

    그때, 동피에 갇힌 기억이 터졌다

  

    오메, 동백이 피었어야.


    희미한 숨소리를 뱉어냈다

  

    이제 동백도 늙었는갑다.


   오열 이었다


 시집 허공을 걷는 발자국을 보았다 (2021.11, 시산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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