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수희 Jun 30. 2022

나의 이름은

박해영, <나의 해방일지> / 엄기호, <공부 공부>

설님. 안녕하세요.


저는 요즘 드디어 한가합니다. 마감도 없고 수업도 없고 행사도 없습니다.(아, 하나 있기는 한데, 뭐 하나니까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전혀 한가하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간 소홀했던 회사 일에 몰두하려다 보니 웬걸, 예전보다 더 바빠진 요즘입니다.


그렇지만 뭐, 놀 건 다 놉니다. 저는 제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위해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일하지 않으려고, 주말에는 쉬려고 노력합니다. 아침마다 스트레칭 운동을 빼먹지 않고 요즘은 저녁마다 달리기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땀날 때까지만 달리자고 마음 먹고 달리는 것인데(저는 땀이 잘 안 나는 체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합니다. 기록도, 거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땀날 때까지만, 힘들기 전까지만, 이 음악 다 들을 때까지만 달립니다. 그렇게 3~4일 연속으로 달렸더니 허리선과 엉덩이선이 단단해졌습니다. 그런데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립니다. 흑흑.


있잖아요, 설님. 얼마 전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나 혼자 산다>에서 몸과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는 기안84와 언제나 평온한 얼굴로 여전히, 꾸준히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그의 친구 충재씨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기안 84는 대충 대충,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이고, 충재씨는 하루 세 끼 건강하게 잘 챙겨먹고 운동도 하고 자신을 잘 돌보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돈이야 기안 84씨가 훨씬 더 잘 벌겠지만 제 눈에는 충재씨의 삶이 더 좋아 보입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움직이기.(플러스 잘 싸기.) 이것들만 제대로 해도 사람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일은 없다고, 번아웃을 겪고 겪고 또 겪을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 늙은이는 생각합니다. 또 사람이 진정 배워야 할 것은 성장하기나 도약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보고 지키는 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 일이 끝나면 우리의 인생도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에 모든 것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생활을 잘 지켜야 합니다. 소중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습니다.


설님. 얼마 전에 끝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저는 무척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것이 나의 최애 드라마인가? 라고 물으면 아니, 그건 아닌데, 라고 답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연출 스타일이 저와는 좀 맞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김석윤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다소 만화적입니다. 저는 <나의 아저씨>를 연출한 김원석 감독의 스타일을 정말 좋아해요.) 그럼에도 어떤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24시간 1년 내내, 아니 10년 동안, 아니 평생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든 장면은 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 삼남매 중의 가운데, 염창희와 그의 소꿉친구들이 망한 카페 자리에서, 집 앞 마당에서, 집 뒷벽에 기대 앉아서 술 마시며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창희네 엄마는 안주를 만들어 갖다주며 너네는 어떻게 어릴 때도 거기 쪼그리고 앉아서 꽃잎 빻고 놀더니만 아직도 그러고 있냐고 핀잔을 주지요.


저는 그 장면들이 너무 좋았어요. 마치 제가 그 자리에 끼어서 끝도 없이 궤변을 내뱉는 염창희의 이야기를 못마땅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결국 쫑코를 주고 마는 친구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책에도 쓴 적이 있지만 저는 뻘소리와 개드립을 정말 사랑합니다. 계속해서 뻘소리와 개드립을 치면서 침을 질질 흘리며 웃다가 테이블 위에 엎어지는 그런 술자리를 사랑해요.


얼굴만 봐도 한숨부터 나오고 서로 서로 욕하고 내가 낫네 니가 못났네 티격태격하지만 그럼에도, 그래서 편한 친구들. 니가 좋아서 친구가 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너밖에 없어서 친구가 됐지만 우리는 알잖아요, 친구가 되는 것보다는 친구인 채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요. 친구가 되어주는 것,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도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대단한 일입니다.


아무튼 저에게 이 드라마는 구씨와 추앙의 드라마라기보다는 염창희와 친구들의 드라마였습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전원일기>처럼 오래 오래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어요. 염창희와 친구들이 시골 밭두렁에서, 온돌방에서 막걸리 마시고 넋두리 하고 말리던 고추 뒤집어 엎고 멱살 쥐며 웃고 우는 그런 노인네들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문득 시아버님이 방에 홀로 앉아 <전원일기> 재방송을 보고 계시는 모습이 떠오르네요. 시아버님도 어쩌면 그러고 싶으신 거겠죠. 그 사람들 틈에 끼고 싶으신 거겠죠.   


그런데 드라마가 끝나고 난 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유달리 주인공들의 이름이 자주 불리는 것 같다고요.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주 이름이 귀에 박힐 정도로 많이 들립니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염기정, 염창희, 염미정 같은 이름들이 말이에요.


드라마의 초반에 동네에서 술을 마시면서도 그들은 잠깐 이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두환 니 이름은 전쟁을 내고도 남을 이름이다, 하고 핀잔을 주다가 니 이름 창희도 만만치 않다고 역공을 당합니다. 염기정, 염창희, 염미정. 다들 뭔가 기가 센 듯하면서도  촌스럽습니다. 그 이름의 주인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해요. 그러나 하도 그 이름이 자주 불리다보니 어느 순간 기정이는 정말 기정이 같고, 창희는 정말 창희 같고, 미정이는 정말 미정이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의 이름인 염미정은 정말이지, 매력적이지 않은 이름입니다. 염씨라는 성씨도 딱히 세련된 느낌이 없는데, 미정이라는 이름도 투박하고 촌스럽지요.(이 세상의 모든 염미정씨께 미리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수희도 제가 듣기에는 도찐개찐…) 사실상 염씨라는 성 뒤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도 성의 아우라가 너무 강해서 이름을 죽이거나 아니면 이름마저 드세게 만드는 듯해요.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 염대선이라는 남자애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별명이 염소였는데, 뺀질거리던 그 녀석도 이제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겠네요.


그런데 이 드라마의 다른 축, 문제의 구씨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염씨네 싱크대 공장에서 아버지를 도와 싱크대도 만들고, 싱크대 일이 없을 때는 밭에서 고추도 따는 그는 자기 이름을 그저 구씨라고만 밝힙니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고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으며 매일 밤 멍하니 앉아 소주만 마셔대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와 사귀게 된(문제의 “날 추앙해요”) 염미정 역시 그의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름을 알아내려 하지 않지요.


그리고 저는 어쩌면 이 드라마는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사회학자 엄기호의 책 <공부 공부>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기 이름이다. 무엇보다 자기 이름은 그 사람의 개체성과 그 개체성의 존엄을 보증한다. 나아가 이름에는 자기 자신의 뿌리와 터전의 존엄과 명예가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름이야말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염미정씨는 항상 겉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지루하게 생겼다고 하지요. 팀장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미워합니다. 미운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이름처럼 투박하고 밋밋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팀장은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이용합니다. 바로 자신의 불륜 상대의 카카오톡 이름을 ‘염미정’으로 저장해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 세상의 한 사람만은 그녀의 이름을 소중하게 불러줍니다. 구씨가 염미정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외치는지, 염미정이 아주 귀에 박힐 것 같습니다.(그래서 센스 좋은 마동석은 손석구와 함께하는 <범죄도시 2>의 무대인사 때, “안녕하세요, 염미정입니다” 하고 자신을 소개해 관객과 손석구를 폭소하게 했지요.) 그리고 염미정은 구씨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염미정! 부를 때 좋아.”


심지어 구씨는 꼬붕인 삼식이에게도 염미정이라고 부릅니다. 이 삼식이라는 인물은요, 본명이 삼식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씨에게는 아무 이름으로나 불립니다. 처음엔 삼식이였다가, 나중에는 춘자였다가, 복자였다가, 또 그 다음에는 염미정이라고도 불리지요. 이유는 본명이 촌스러워 개명을 했는데 개명한 이름(우빈이라고 하지요…)이 싫다며 구씨가 마음 내키는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름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명하지 않는 한은 말이에요. 이름은 주어진 숙명 같은 것입니다. 그냥 잊어버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수십번씩 우리는 그 이름으로 불리니까요. 그래서 이름이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단순히 그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것뿐 아니라, 계속해서 발음되는 소리를 듣고 자랐을 때, 그 이름이 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말하는 타자다. (중략)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모르는 존재, 타자로 대해야 한다. 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얼마 전에 오랜만에 친정에 갔더니 엄마도 이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더라고요. 마침 바로 앞 시간대에 다른 채널에서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 드라마보다 <나의 해방일지>가 훨씬 좋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엄마는 구씨와 미정이가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구씨도 구씨지만, 저는 염미정이 정말 좋습니다. 염미정,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일처럼 힘든 염미정, 도무지 세상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염미정, 언제나 조심스럽게 말하는 염미정, 그럼에도 고집스러운 염미정, 그래서 가끔 또라이 같은 염미정,  주눅  염미정, 하지만  내면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깊고 너르고 야성적인 세계를 품은 염미정.  염미정은 어쩌면 엄마의 마음에도,  마음에도 숨어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한때는 염미정이던 때가 있지 않을까요.


염미정이 해방되려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개새끼를 모으던 자신에게서 해방되기.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는 자신에게서, 버려진 느낌에 시달리는 자신에게서 해방되기. 그래서 염미정이 택한 방법은 해방일지를 쓰기와 사랑하기, 입니다. 구씨를 사랑하기예요.


그리고 염미정의 사랑 방식은 추앙하는 것입니다. 염미정은 구씨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구씨가 변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더 가보라고, 나는 아직 당신이 괜찮다고 말해줄 뿐입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은 대로,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알코올 중독이면 알코올 중독인 대로, 당신을 추앙한다고, 당신의 삶을 응원한다고 말해줄 뿐이지요.


이 드라마는 어쩌면 자신의 이름에서 해방되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이름은 바로 숙명, 주어진 운명을 뜻합니다. 그들이 해방되려는 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경기도 변두리의 농촌 마을에서 자라 서울로 죽어라 출퇴근을 하는 운명. 촌스럽고 밋밋한 개성. 부족한 살림. 타인의 삶에 대한 부러움. 질투심. 사랑받지 못하는, 언제나 어디가 좀 모자란 것 같은 자신. 그런 것들 말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지금껏 염기정, 염창희, 염미정으로, 남들이 부르는 대로 살아온 운명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기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벗어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로 그것이 '자기 배려'라는 것이겠지요.


설님.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처음에 저는 김설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다소 작위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지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이 사람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이 사람의 진짜 이름이 이 사람과 안 어울린다면 어쩐지 실망스러울 것 같다, 는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원래 의심이 많은 인간이라 그러니 무례해도 용서해 주세요.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설님의 본명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하하하, 하고 웃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름은 설님과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에요. 그래 바로 이 이름이어야 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이 이름이 아닌 이름은 상상할 수가 없어,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 이름은 여성스러우면서도 강인했고, 평범하면서도 세련되었으며, 무엇보다 예민하고 화려하게 들렸습니다. 그게 딱 김설 작가님의 본체 같았습니다. 그러자 음, 이 사람은 무언가를 감추고 싶었던 것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이름을 두고 그럴 리가 없지, 싶었습니다.


설님. 사람에게는 10년에 한 번씩 대운이 찾아온다고 하지요. 그것은 그저 운이 좋다기보다는 인생의 흐름이 조금 달라진다는 의미로 저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올해가 저의 대운의 해인 듯 해요.(물론 사주팔자를 보지는 않았습니다.) 내 인생이 확 달라진 지점이 언제였나, 하고 생각해 보니 대충 25살, 35살이었거든요. 그때 제 인생에는 드물게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요. 아마도 그 해에 저의 외향성이 최대한도로 발휘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45살이 된 올해도 그런 것 같고요.


저는 내향적이면서도 외향적인 성격인데요, 가끔 그렇게 미친 듯이 외향적으로 살다가 어우 짜증나, 인간이 싫어, 다 싫어, 혼자 있고 싶어, 하고는 다시 문을 닫고 혼자 방에 처박히고는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구씨가, 매일 홀로 평상에 앉아 산을 보면서 소주를 마시고 또 마시는 구씨가 그렇게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떤 때는 괜찮은데 어떤 때는 사람들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싫어. 저기 앞에서 사람이 걸어오면 그것도 싫어.


저는 구씨의 비뚤어진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꼭 제 마음 같습니다. 올해 저는 미친 듯이 외향적으로 살다가 슬슬 사람이 싫어질 작정입니다. 그리고 오십쯤 되면 또 홀로 처박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십오세가 되면 다시 외향적인 인간이 되겠지요. 그때까지 제 오래된 친구들이 저와 함께 뻘소리와 개드립을 치며 서로를 지긋지긋해하며 함께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작정입니다.


아,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해방클럽이라는 동호회에서 서로의 해방일지를 함께 나누다가, 문제점은 뭔지 알았지만 해결책은 모르겠다는 동료에게 염미정이 이렇게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그게 전부인 것 같아요. 내 문제점을 짚었다는 것.”


그 말을 할 때 저는 배우 김지원의 연기가 정말 좋습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보다 더 조심스러울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그럼에도, 단단하게. 그러면서 생각했지요. 이 드라마는 인간을 배려할 줄 아는 드라마구나, 뭐든 섣불리 주장하고 단정하지 않는구나. 이렇게 조심스럽고, 이렇게 깊고, 이렇게 따뜻하구나.


저는 조심스럽지도 않고 깊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지만,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언제나 선망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최소한 어떤 순간에는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래요, 교훈을 좋아하는 한수희는 이 드라마에서 그런 것을 배웠답니다.


6월 30일

이름과 본체가 안 어울리는 한수희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의 자격은 무엇일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