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을 증명하라
수희 님, 아니 작가님! 안녕하세요.
오늘만큼은 작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나에게 최초로 글이라는 걸 쓰고 싶게 만든 작가님. 배우 한소희보다 작가 한수희가 훨씬 예쁘다고 했던 어떤 분의 sns 댓글을 읽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던 사람. 바로 저 김설입니다.
수희 님!
언젠가 동인천 어디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식당(이름을 알지만 이곳에서는 밝히지 않겠습니다)에 다녀오신 적이 있으시지요? 저는 수희 님의 인스타그램에서 그곳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왜냐하면 그 식당엔 저도 몇 번 가본 적이 있었거든요. 거긴 바로 얼마 전까지 제 친구가 운영하던 곳이었어요. 물론 수희 님이 가셨을 때는 그 친구가 가게를 팔고 손을 턴 뒤였지만요. 수희 님이 드셨던 음식이 양고기였던가요? 제 입에 맞지는 않았지만 저도 그 고기를 사 먹었고요. 우리가 밥을 먹는 것처럼 우즈벡인들이 매일 먹는 화덕에 구운 빵도 먹어봤어요. 가게는 장사가 무척이나 잘 되는 편이었어요. 누가 봐도 식당을 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코로나에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도 친구는 식당을 정리했어요. 그걸 정리하고 한동안 두문불출했답니다. 마치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군인과 비슷한 심정이었다고 해요. 친구는 한동안 많이 아팠어요. 보통의 한국인이 받는 월급보다 훨씬 더 가져가면서도 우즈벡 사람이라는 이유로, 우즈벡 말을 한다는 이유로, 우즈벡 음식을 만들 줄 안다는 이유로 배짱을 부리는 직원들 때문에 수시로 속이 뒤집히고 마음의 병을 얻었지요. 나는 친구의 고충을 몇 년 동안 들어온 터라 우즈베키스탄인이나 러시아 쪽 불법 체류자들에게 조금은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어요. 하도 기막힌 이야기를 많이 들어 놔서요.
사실 제가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그들을 탓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군요. 아무튼 우즈벡 사람들을 떠받들고 꾸려가야 하는 장사가 쉽지 않았지만 그들을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도 분명히 있었기에 그 정도 어려움은 우즈벡 식당을 하는 사람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대요. 그리고 정작 식당을 하면서 힘이 들었던 건 우즈벡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싫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한국에서 식당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편이 한 명도 없는 타국에서 장사를 하는 기분이 들었을 만큼 지독하게 외로웠다고 해요. 그 외로움과 서러움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서 결국
'이렇게 돈을 벌어서 뭐하나.' 하는 허망함까지 느꼈나 봐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불법을 묵인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공무원들. 불법체류로 남의 나라에 와서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안 잡히면 그만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들. 잡혀봤자 추방당하면 그뿐이라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사람들, 자국민을 보호하는 쪽이 아니라 불법 체류자를 보호하게 되는 너무나 허술하고 빈틈이 많은 법까지. 자세히 알면 알수록 실망감이 크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런 일들이 당장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다 보니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넘어갔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고 손해를 크게 보게 되니 억울하기도 하고 덜컥 겁이 나더랍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내가 장사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여겨서 어렵게 용기를 내 신고를 했대요. 하지만 상황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고 신고한 사실이 더 큰 문제가 되어버렸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도 상황을 바로잡을 방법은 없었고 답답한 마음에 담당 공무원을 찾아가 여러 번 하소연을 했다고 해요. 그리고 결국 이런 말을 들었답니다.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말아 달라.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다. 법이 그런 걸 어쩌란 말이냐. 그냥 손해 보고 말아라. 더 이상 문제를 만들면 당신이야말로 진상이 된다.
모든 걸 포기한 날 친구가 했던 말을 나는 기억해요.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닌 가봐. 한국인이라는 무리에서 떠밀린 기분이야." "어째 한국인이 한국 사람에게 인종 차별을 당한 기분이 든다? 정말 이상하고 기분이 더러워."
친구의 그 일은 나에게도 많은 생각 거리를 던져 주었어요.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했던 예전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유난히 삶의 부침이 많았던 저는 한때 한부모 가정이 됐던 기초생활 수급자가 됐던, 뭐라도 좋으니 조금이나마 나라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혼자 자식을 키우며 꾸려가는 살림, 빠듯했지만 꾸준히 해온 일을 놓지 않는 한 남에게 손 벌리는 일은 없을 줄 았었는데 문제는 엄마의 간병비였어요. 병원비를 제외하고도 들어가는 간병비가 한 달에 300만 원. 그러나 나는 수급자의 조건에도 한부모 가정의 조건에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한 경우였어요. 그야말로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이 된 거죠. 나라의 도움을 받으려면 훨씬 더 가난해야 하는 상황. 도대체 어디까지 가난해야 할까. 도대체 얼마나 죽어야 살아날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알았어요. 가난을 확인시키는 과정, 텅 빈 통장과 지갑을 뒤집어 보이며 복지 혜택을 받는 일은 한 인간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버리는 일이라는 사실을요.
수희 님 얼마 전 뉴스에 특고 프리랜서 지원금이 얘기가 나왔죠. 수희 님은 예술인 지원금을 받으셨나요? 저는 우연히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고 그 절차를 확인해 봤거든요. 그러려면 우선 예술인이라는 걸 인정받아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저는 그 말이 웃겨서 혼자 킥킥 웃었어요. 예술인이라는 걸 인정받는 절차가 있다는 것도 좀 웃기고 당신은 예술인입니다! 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 건지. 그러려면 어떤 걸 보여줘야 하는 건지. 그들에게 예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스스로를 예술인이라고 여기면 안 되는 건지. 가난을 인정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으로 아는 나는 예술인으로 인정받기도 못지않게 어렵다는 걸 짐작했어요. 절차를 밟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안될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인간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래도 세상에 책을 두 권 냈으니 작가의 무리에 끼워주지 않을까. 그 무리 한 귀퉁이에 껌처럼 달라 붙고 싶다.
결과요? 그야 뻔하죠. 저는 예술인이 되지 못했고 작가도 되지 못했어요. 그쪽에서 온 거절 메일을 읽고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답니다. 그 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김설 님의 책에 적힌 자기소개 글에는 어쩌다 보니 글을 쓰고 작가가 되었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작가로 인정받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엥? 나는 그런 의미로 쓴 게 아닌데? 왜 넘겨짚고 난리지? 하하하. 이럴 줄 알았다면 나를 소개하는 글을 그렇게 쓰지 않는 건데,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을 깎아내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게 겸손이라고 여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엄청 뛰어난 작가는 아니지만 유의미한 작업을 한 사람으로 나를 조금 더 강하게 소개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작가님! 오늘 편지는 시종일관 넋두리네요. 지난 며칠 동안 좋은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그 얘기는 접어두고 예술인 타령으로 시간을 다 썼어요. 책 이야기를 할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오늘 잡담을 이해해 주실 거죠?
2022. 6.21
우리의 유의미한 작업을 상상하는 김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