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설님. 안녕하세요.
실로 오랜만의 편지입니다. 이번 편지는 일주일이나 늦게 띄우게 되었어요. 지난주 토요일을 마지막으로, 4월부터 이어진 저의 대장정이 일단락되었습니다. 원고들은 모두 마감에 맞춰 보냈고, 수업과 모임도 모두 마무리되었어요. 그외의 크고 작은 일정들에도 모두 ‘완료’의 줄을 시원하게 그었습니다. 그간 주말마다 집을 나가 있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가족들에게도 소홀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정말로 집에 처박혀 있을 작정이에요.
아무튼, 그리하여 우리의 편지 교환은 시작된 후 처음으로, 일주일이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과연 몇 분이나 새로운 편지가 오기를 기다릴까만은, 설님에게만큼은 이러한 폐를 끼쳐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 보기보다 마감을 잘 안 어기는 타입이거든요.
설님. 지난번 설님이 써주신 편지와 연결이 되는 내용인데요, 요 근래 저는 전대미문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 자식들이 완연한 10대 청소년기에 접어든 것입니다. 큰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 대학 입시를 향해 달려가게 되었고, 작은 아이의 자유학년도 끝나서 이제는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받아옵니다. 성적표를 볼 때마다 저는 놀라지요. 이럴 수가, 이렇게 공부를 못하다니.
제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말할 때, 남들은 어쩌면 엄살을 부리거나 과장을 한다고 믿을 수도 있을 거예요. 정말로 공부를 못하는데 저렇게 뻔뻔할 리가 없잖아? 라고 생각할지도요. 그런데 이건 정말입니다. 시험을 보면 맞은 문제보다 틀린 문제가 더 많은, 그런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입니다.(아직 중학생인 둘째는 좀 낫고, 고등학생인 첫째는 더 심각합니다.)
아무리 제가 막가파라 한들, 그런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잖아요?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분명히 학교에 다녔고 수업도 들었을 텐데 어떻게 맞은 문제보다 틀린 문제가 더 많을 수가 있는 건가요? 아무리 학원을 안 다닌다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뒤이어 이런 사실을 깨닫지요. 아, 나는 내가 낳은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아이’ 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구나.
저는 생각해 봅니다. 과연 공부를 못하는 아이란 어떤 아이일까? 숫자로 따진다면, 아마도 전국의 학생 중 최소한 10% 안에는 들어야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90%에 공부를 그럭저럭 하는 아이들과 못하는 아이들이 들어 있겠지요. 90%. 자그마치 90%입니다. 성적이 보통인 아이들, 성적이 나쁜 아이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 중에 제 아이들이 낄 거라는 생각은 지금껏 안 해본 겁니다. 어이가 없지요.
그리하여 저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널이 뜁니다. 교육서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다가도, 문득 불안과 공포가 몰려와 벌떡 일어납니다. 안 돼, 저 애들을 실패한 인생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어! 뭐라도 해야 해! 이게 정말 우스운 게 뭐냐 하면요, 저는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지 않고 대안학교에 보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패니 뭐니 하면서 말이에요.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과정을 대안학교에서 마쳤습니다. 큰아이는 검정고시를 봐서 공립 중학교에 들어갔고, 둘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공립 초등학교로 편입을 했지요. 그 애들은 10대가 되어서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험이라는 것을 보고 등수라는 것이 매겨지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부를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겠지요. 그 충격은 아마 엄청났을 겁니다. 그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개성으로 인정되었거든요. 노래를 잘하는 아이, 책을 좋아하는 아이,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 다정한 아이, 춤을 잘 추는 아이, 시크한 아이, 재미있는 아이, 그런 것들이 중요했습니다.
아이들이 대안학교에서 자란 것에 대해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안학교라는 곳은 초창기에는 언제나 선의와 열정이 넘치는 법이고, 우리 아이들은 다행히 초창기에 그 학교에 다니면서 무한한 애정과 보살핌을 받았고, 자기 긍정감이라든가 어울려 사는 지혜 등을 얻었다고 믿어요. 동시에 아이들은 하루하루 정말이지 미친 듯이 뛰어 놀며 자랐습니다. 물론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고요. 저는 어릴 때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신 나게 노는 것이라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잘 놀아야 잘 사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상은 현실과 자꾸만 부딪칩니다. 딸아이의 시험 성적을 보면서, 그리고 그 애가 공부하는 방식을 보면서 어이가 없고 때로는 분노가 솟구칩니다. 왜 이렇게 하지 않지? 왜 더 꼼꼼하게 보지 않지? 왜 틀린 문제를 다시 안 풀어보지? 왜 이걸 모르지? 고백할게요. 저, 얼마 전에 딸에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공장 가서 일하는 건 쉬울 것 같니?!” 그 말을 한 후 저는 처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부끄러웠어요.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어요. 고통스러운 몇 주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생각했지요. 왜 나는 공장에 다니면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럴 때 제가 책장에서 꺼내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어, 이거 사실 제목이 너무 육아서라서, 좀 부끄럽기는 한데요, 그래도 효과는 직빵입니다. 바로 하지현의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라는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남편이 비웃더라고요. 비웃을 테면 비웃으라지, 난 지금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이라고! 하며 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습니다. 요즘은 침대 옆에 이 책을 놓아두고 눈만 뜨면 아무 쪽이나 펼쳐 읽고 있습니다. 이미 수없이 읽었는데도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구절들이 많습니다. 종이 위의 활자들이 가진 무겁고 깊은 의미는 어떤 일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슴에 와서 부딪치는 법이니까요.
부모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부모는 아이가 정말 잘못될까 봐 무서운 것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이상이 실현되지 못할까 봐, 다른 아이와 비교당할까 봐 무섭고 불안하다. 그래서 그 불안을 아이에게 쏟는다. 물론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서다.
하지만 이제는 근본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이제는 뭘 더 해줄까가 아니라, 더 해주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하면 참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미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가 그린 설계도대로 자라나고 있다.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삶이 주는 행복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채 부모를 원망하면서.
제가 아이를 걱정하고, 몰아붙이는 그 일들의 근원은 공포와 불안이라는 감정에 맞닿아 있습니다. 저는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제 공포와 불안을 들여다보려 애씁니다. 저는 아이들이 실패할까 불안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처럼 살게 될까 무섭습니다. 혹사당하고 착취당하는 삶을 살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겨우 겨우 연명하게 되는 건 아닐까 공포에 떱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끝없는 비참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이렇게 써버리고 나니 우습네요. 이런 삶이 성적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답니까.(그래서 글쓰기라는 행위는 자기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지요.)
제 친구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박사가 되겠다며 다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애는 거기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어요. 그 애가 쓰는 논문 중에 플랫폼 노동자들의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애는 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저는 정말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지요. 플랫폼 노동자들, 구체적으로 집어서 말한다면 로켓배송을 하는 회사의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 배송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뭐랄까요, ‘힘듬’ 또는 ‘비참함’ 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뉴스에서 들은 이야기들에 기반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누군가의 삶을 ‘비참함’ 이라는 단어로 짓뭉개버리는 것은 좀 폭력적인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애가 본 플랫폼 노동자들의 삶은 여느 노동자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점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동료로 대하고, 돕고, 보살핍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어서(물론 여러 가지 제약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점을 높게 산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친구는 그 글을 쓰기 위해서 짧게나마 배송 일을 해보았는데, 물론 너무 짧긴 했지만 지금 쫄딱 망한다고 해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겠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찜통 같고 냉동창고 같은 물류센터에 에어컨을 설치해주지 않는, 노동자를 쓰고 버리는 휴지조각 취급하는 그 회사의 극악함에 치를 떱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온통 불행으로만 채색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 친구의 이러한 관점은 그 애가 몸담고 있는 학계의 일부에게는 위험한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 노동자들은 불행하고 불쌍한 존재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을 해방시키고 구제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들이 거기에서 자기들 나름의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며 살면, 그것은 자본가의 배를 불려주고 이 착취의 시스템을 더 공고히 하며 자기 앞의 진정한 현실을 외면하는 정신승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누구의 삶을 평가하고 단정짓는 것이야말로, 구제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제 불안의 실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이 삶에서, 고작 이 정도의 삶에서 밀려날까 불안에 떱니다. 그러면 내가 갈 곳은 저 지옥 같은 곳 뿐이겠지, 라는 생각 때문에 말이에요. 어디에 가도 사람들이 있다, 삶이 있다, 내가 서있는 이 곳이 낭떠러지가 아니다, 고 믿을 수 있다면 저는 이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은 겨우 겨우 용기를 낸 이들의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리지요. “쟤들은 돈이 있잖아.” “집안이 좋잖아.”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낍니다. 나이를 그렇게나 먹고도 그런 말 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안쓰럽습니다.
아무튼 제 불안의 근원은 이런 곳에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제 불안은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세상이 바뀌는 곳 역시, 제 마음에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면 제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본 김누리 교수의 강연에서 그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 떠오르네요. 한국의 교육이 바뀌려면, 교육의 수혜자들, 당사자들이 일어서야 한다. 그러니까 교사도 아니고 부모도 아닌, 바로 학생들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누가 누군가를 불쌍하게 보는 것, 비참한 이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자각하고 함께 일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줘야겠지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 삶을 잘 보살필 줄 아는 지혜를 가질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를 더 해주려고 애쓰기보다, 내가 지금 해주고자 하는 것이 사실은 나의 욕심과 불안을 아이에게 투사하려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십대 이후부터는 ‘뭔가를 더해주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묵묵히 지켜보는 자제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부모가 제시하는 선택들이 틀릴 수도 있고, 부모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부모 또한 빈틈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아이 또한 자신이 실수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다.
그러다가 지치고 다쳤을 때, 힘이 들어서 휴식이 필요할 때 부모에게 돌아오면 된다. 그때 부모는 담요가 되어 지친 아이의 몸과 마음을 감싸주고, 항구가 되어 험한 바다를 잠시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항구 역할을 하면 된다. 바로 이것이 세상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부모의 결정적 역할이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이 애들이 좋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90%의 나머지들이 모두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10%의 소수의 삶이 오로지 행복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언제 비참해질까? 사람은 언제 행복해질까?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행복이 무엇인지,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행복은 찰나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싶던 떡볶이를 먹을 때 행복하고, 깨끗한 거리를 산책할 때 행복하고, 나무의 푸른 잎을 보며 행복합니다. 먹을 수 있어서, 걸을 수 있어서, 살아 있어서 행복합니다. 잘 산다는 건 그런 행복한 찰나들을 자주 누리며 사는 것일 테지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바라는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되는 일일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그리고 타인이나 세상에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남편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우리의 대학 간판이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거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제 아이들은 아마도 저희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대학의 간판과는 별 관계 없이,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전혀 관계 없이 살고 있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 역시 대부분, 대학의 간판과는 별 관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때의 삶과 지금의 삶은 다르니, 현실을 보라고,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사람들 중에 정말로 닮고 싶은 삶을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남들의 조언과 훈계를 거르는 조건은, 그들 중에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의 말은 그냥 거르면 됩니다. 당신은 계속 그렇게 당신이 믿는 대로 불안하게 사십시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제가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키워온 작지만 단단한 자부심은, 이 삶은 내가 선택한 것, 이라는 사실입니다. 대학과 학과를 선택할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제가 스스로 선택해 왔습니다. 부모님은 통보만 받았지요. 어떤 일에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안타까워할 때도, 못마땅해할 때도 있었지만 일단은 제 선택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스스로 수습해 보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배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다음 달 가스비를 못 낼까 봐 불안에 떨던 때도 있었고, 그 사실에 화가 나고 기가 막혀서 모아놓은 적금을 털어 국민연금 미납분을 모두 내버리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국민연금은 내고 만다’ 하고 다짐했던 적도 있어요.(불과 몇 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도 불안하기는 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도 어떻게든 행복할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만들려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 갑니다.
완벽한 부모는 없다. 좋은 부모가 있을 뿐이다. 부모는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한다.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은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뿐 아니라, 완벽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짝 긁힌 자국이 있다고 해서 그 물건의 가치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도 약간 빠지고 긁힌 자국도 있는 물건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가치도 높다. 인생의 풍파가 느껴지는 사람에게서 묻어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고생한 티도 전혀 나지 않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나는 그런 사람이 별로 부럽지 않다. 운이 엄청나게 좋거나 매우 좋은 환경에서 살아온 덕분일 텐데, 그런 삶이 그 사람의 일생에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글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사람보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인생의 풍파와 상처들을 트라우마가 아닌 삶의 역경으로 받아들이는 씩씩한 사람들이 훨씬 좋다. 그리고 그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보입니다. 아이의 공부 방식에, 시험 성적에 연연하는 것이 지금 제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저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제 곧 제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야 할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너 자신과 세상과 삶을 받아들이는 너의 태도라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너는 정말로 소중한 아이라고 응원해 주는 일입니다. 한 번의 실패가, 여러 번의 실패가 반드시 불행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일입니다. 망해도 불행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였어요. 저는 연극영화과에 다니고 있었고, 1학년들은 영화를 찍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선배들의 영화에 스탶으로 참여하는 경험을 쌓았지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아이들은 벌써 이 영화, 저 영화에 부름을 받았으나 내향적이고 인상도 나빴던(제가 생각해도 기분 나쁜 여자애였지요) 저에게는 아무도 스탶이 되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에 낙담했습니다.
어느 날 공중전화 부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응석을 부렸지요. 아무도 나에게 스탶이 되어달라고 하지 않아. 저는 응석을 잘 부리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에 엄마도 놀랐을 겁니다. 그때 엄마는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그랬느냐고, 힘들겠다고, 집에 돌아오면 맛있는 걸 해주겠다는 말만 했습니다. 그래서 무척 다행이었습니다. 엄마가 답답한 마음에 그러게, 너는 왜 남들처럼 사교적이지 못하느냐고 면박을 주거나, 인간관계에 대해 조언해주었다면 저는 더 답답해졌을 겁니다. 그러나 엄마는 제 이야기를 그저 들어만 주었고, 저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수화기를 든 순간부터 구원받은 느낌이 들었던 겁니다.
그러게요. 그런 거 아닐까요. 그저 아이들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면 되는 거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헤쳐나갈 힘이 있으니까요. 힘이 있어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그리고 그 힘은 누군가가 세상의 어딘가에서 나를 열렬히 응원해주고 있다는 믿음 덕분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인 거 아닐까요.
설령 아이가 잘못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결코 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아무리 안전운전을 해도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는 피할 수 없듯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때 산산이 부서지지만 않으면 된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사건이 내 삶을 산산조각 낼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공포다. 하지만 큰 고난이 우리를 덮친다 해도, 평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온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어딘가 긁히거나 패일 뿐, 산산조각나지는 않는다. 담이 무너지듯 무너질 순 있지만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니, 다시 조립해서 쌓아올리면 된다. 근본은 절대 다치지 않으니 안심해도 된다. 이런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 균형 잡힌 태도를 갖는 것이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진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길이다.
부모가 되어보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도 엄청나게 재수 없고 오만한(지금도 재수 없고 오만한데…) 반쪽짜리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이 제 머릿속에서 굴린 대로 굴러갈 거라 믿었을 것이며, 인간이란 제 삶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를 저는 매순간 깨닫습니다. 매순간 아이들은 저를 좌절하게 하고, 제가 믿었던 가치를 의심하게 하고, 저 자신에 대해서 고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려 있습니다. 이전에는 몰랐던 세상 말이에요.
다행히 공부를 못해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애도 나름 자존심이 있는 애라서 쉽게 포기할 타입은 아닙니다. 제가 다그칠 때는 시큰둥하게, 반항적으로 “뭐라도 되겠지!” 하고 소리치던 아이가 함께 길을 걷던 밤에 제게 불안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습니다. “엄마, 난 왜 공부를 못할까?” 그제야 이 아이는 제가 낳은, 작고 약하고 소중한 아이가 됩니다. 어린 시절의 그 귀엽던 아이는 어디로 갔나, 했는데 저는 그 아이가 여전히 제 곁에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이에게 해줄 것은 그 질문, 난 왜 공부를 못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들려주는 것뿐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습니다.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뭐라고 말했을까요? 흐흐. 그 답은 너무 당연하니, 책 속의 글귀로 대신하겠습니다.
<고민하는 힘>의 저자인 강상중 교수는 ‘진정한 여유란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정신의 폭이 넓다는 것’이라고 했다.
부모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리고 그 사람들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해나가면 그래도 조금은 낫지 않을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어쩌려고 그래?” “지금 안 시키면 늦어” “현실이 그러니까” “내가 살아보니” 하고 딱히 신빙성도 없는 불안감과 자괴감을 흩뿌리는 대신에, 용기를 북돋워주고, 응원해주고,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로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단체활동이라면 일단 질색이고, 딱히 좋은 부모라고 말하기도 어려우며, 매일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는 부족한 인간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저 멀리 미지의 부모들을 향해 그런 좋은 기운을 던져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좋은 기운을 그들로부터 받고 싶어요.
그래요, 제 아이들은 공부를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좋은 부모가 아니에요. 그래도 제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저는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을까요?
설님. 오늘 파리바게뜨 본사의 횡포에 파리바게뜨 불매 운동이 번지고 있다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저는 그 뉴스에 공감하면서도, 우리 동네 파리바게뜨 아저씨 큰 맘 먹고 리모델링한 지 이제 두 달도 안 되었는데 어쩌지? 하고 걱정이 됩니다. 삶은 복잡한 것입니다. 이 복잡한 삶을 아이들이 잘 이겨내며, 슬기롭게, 지혜롭게 살아가기를 빌어보려 합니다.
6월 14일
어머니 수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