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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un 05. 2022

내 안에 숨은 기억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 <김준기>


수희 님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무척 바쁘실 걸 알면서도 편지를 받는 게 너무나 좋다며 제가 SNS에서 질척댔지요? 가뭄에 콩 나 듯 천천히 보내주셔도 좋으니 당분간은 이 서신 교환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보니 그랬네요. 신기하게 이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지기만 하네요. 무슨 영문일까요? 편지를 주고받는 일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우린 같은 마음이었었죠. 만약에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생기더라도 그들을 의식하지 말고 즐겁게 쓰자고요. 하지만 나는 지나치게 의식을 했지요. 처음에는 들뜬 마음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는 재밌는 책을 소개하고 싶은 욕심으로 변했어요. 그러나 나란 사람이 재밌는 책을 읽지는 않았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내 속에 담긴 이야기는 빈약하기 짝이 없고 그러다 보니 편지의 내용은 우왕좌왕. 그러면서 내가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볼 용기를 잃어버렸고요, 다음 날 읽어보면 낯부끄러운 편지를 써 놓았더라고요, 다행히도 이제는 그런 마음에서 놓여난 것 같아요. 처음처럼 어깨에 힘을 주지도 않고 잘 쓰려는 의식도 없이 그저 수희 님의 안부를 묻고 나의 일상을 풀어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서로에게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편지를 쓰는 일이 일상이 되고 보니 더 이상 선물이 아니게 된 것이지요. 일상의 힘이란 그래서 강력한 게 아닐까요  이 편지도 좋은 책을 읽었든 읽지 못했든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편한 마음으로 씁니다.


수희 님! 지난번 꿈 얘기는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이 사람은 진짜 이야기 꾼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소설을 써야 한다. 자기 꿈 얘기를 이렇게 실감 나고 재밌게 쓰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이런 말을 마음속으로 안 하고 혼자 흥분해서 큰소리로 떠들었지요. 꿈이라면 나도 만만치 않게 꾸는데요. 수희 님 꿈처럼 웃긴 게 아니라 기괴한 내용이 많아요. 대체로 좀 무서운 걸 꾸는 편이랍니다. 거의 악몽 위주로. 어느 날은 왼쪽 눈과 코의 절반이 오른쪽으로 밀린 얼굴이 돼서 야옹야옹~ 애처롭게 우는 우리 집사 (고양이 이름) 꿈을 꿨어요 나는 꿈에서 길길이 날뛰어요. 힘이 센 곰이 혓바닥으로 고양이 얼굴을 핥은 게 분명해. 이 곰 새끼 어딨어. 그러면서 증거도 없이 곰을 미워하는 꿈. 또 어느 날은 오른쪽 발톱이 100년 된 고목의 껍질처럼 썩었더라고요. 보기가 흉해서 깎으려고 살짝 건드리기만 했는데 글쎄  발톱 다섯 개가 힘없이 빠져버리고 발톱이 있던 자리가 맨질맨질해지는 꿈을 꿨어요. 나는 앗! 발톱이 예쁘게 빠졌네? 피도 안나네? 히면서 좋아했고요. 그런 꿈을 꿀 때면 실제로 흐느끼다가 깨거나 웃다가 깨요. 그리고 며칠 뒤면 내가 꾼 꿈이 예지몽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잡다한 사건이 생기곤 하죠.



그건 그렇고 수희 님 요즘 고민이 생겼어요. 대단한 건 아니고 저녁마다 쓸데없는 후회를 해요. 내가 오늘 한 일이 뭐더라? 아무것도 안 했네?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은 게 없네? 그렇다고 신나게 논 것도 아니고 좋은 걸 보러 나갔다 온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청소나 하고 세탁기나 돌리고 인터넷 쇼핑으로 슬리퍼를 사거나 고양이 장난감이나 구경하다가 냄새가 풀풀 나는 머리도 못 감았네? 그리고는 자기 전에 읽던 책도 저만치 밀어 놓고 TV를 켜요. 그런데 정작 보지는 않고 채널도 돌리지 않고 틀어만 놓는 거예요. 심지어 어떨 때는 소리도 안 나게 하고 두세 시간을  아무 생각도 없이 멍 때리고 앉아 있다가 피곤해지면 그 길로 누워요. 그날 저녁도 그렇게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 중 TV 화면 왼쪽 상단에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이라고 쓰여있는 걸 봤어요. 귀신에 홀리 듯 프로그램 제목에 이끌려 볼륨을 높였다가 그야말로 지옥을 보게 되었어요.

어떤 유명 배우의 부모가 부부 싸움을 하는 장면이었는데요.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카메라 앞에서 격한 몸싸움을 한다는 것도 놀랍고 도무지 진정이 안 되는 어머니의 모습도 걱정스러웠어요. 저러다 큰일 나지 싶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는데요. 결국 실신을 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시더군요. 어머니가 쓰러진 이유는 다름 아닌 남편의 도박 때문이었어요. 남편 분은 공장에서 야근을 하다가 잠깐 머리를 식힐 겸 화투를 만진 거라고 해명했지만 부인은 믿지 않았어요.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닌 데다가 화투판에 낄 때마다 야근을 한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때마다 들켰기 때문에 더 이상 신뢰를 하지 않게 된 거죠, 그러나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발악처럼 보이는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에요. 저건 너무 지나치다, 아무리 그래도 남편 친구들 앞에서 저렇게까지 망신을 줄 수 있는 거냐. 저 난리를 치는 건 과하다, 정신적으로 어디 안 좋은 거 아닌가.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어요. 어떤 발악의 실체는 발악이 아니라 공포거든요. 그리고 그 정도의 격한 반응은 보통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의 반응이고요.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 지나왔을 고통의 시간을 짐작했어요. 때로는 작은 사건이 오래된 기억을 소환시키고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를 건드리곤 하지요.


트라우마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변하지 않는 습성이 있어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선명해지기도 해요. 그러나 슬프게도 사람들에게 이해받는 건 어려워요. 발악하는 사람의 사연을 짐작 조자 할 수 없으니까요. 전쟁이나 대형 사고 같은 큰 일을 겪었다면 그나마 이해해 주겠죠.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럴까.. 하면서요. 그러나 스몰 트라우마는 달라요. 당사자가 아무리 힘들다고 말을 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아요, 대개는 이런 반응들이죠. 이젠 잊을 때도 되지 않았냐, 그 정도의 사건도 없이 평탄한 인생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다. 등등. 그런 말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이 겪은 힘듦은 없던 일이 되는 거예요. 누군가는 공포였던 사건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작은 사고인거죠.


오은영 박사 님이 주목했던 점도 신실을  정도의 공포감을 드러낸 어머니의 모습이었어요. 그분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남의 집을 전전하며 고생을 했대요. 경제적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겠죠. 아마 가정과 남편이라는 울타리가 절실했을 거예요.  울타리가 의미하는  안정이었고요, 그러나 결혼 이후에도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가 봐요. 그도 그럴 것이 고생해서 마련한 집을 주식 투자로 날렸고 또다시 남의 집을 전전하게 만들었거든요. 힘든 세월이 흘러 이제는 빚도 어느 정도 갚고 편안한 노후를 꿈꾸려던 때에 화투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같았을 거예요, 게다가 지금은 망하기라하면 회복할 시간이 부족할 만큼 나이가 들었으니까요.  

"이 인간과 더는 살 수 없다. 정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는 어머니의 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거에요. 그러나 공포를 겪게 한 상대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이런 말을 해요.


" 이 사람이 왜 이래? 별 일도 아닌 걸 가지고, 고작 백 원짜리 화투를 친 거 가지고 왜 이렇게 발광을 하지?"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필라테스를 하고 온 딸이  밥을 먹다가 느닷없이 우는 거에요. 26살 먹은 애가 6살 아이처럼 엉엉엉. 수희 님도 아시잖아요? 내가 딸아이의 눈물과 고통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요. 내가 한때는 딸의 고통과 눈물의 원인 제공자였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왜 우는지 물어봤어요. 딸의 말인 즉은 필라테스 강사가 자기를 무시한다는 거예요. 몸이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아서 끙끙대고 있는데 일부러 농땡이를 부리려는 사람을 대하듯 엄살 피우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딸은 그림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다 보니 몸 여기저기가 변형되고 굳었거든요. 내가 보기에도 하루아침에 부드러워질 몸이 아닌데 강사 님은 빠르게 몸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지나치게 열심히 코치를 해주셨나 봐요. 힘들다. 이건 정말 무리다. 나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몸이 달라지길 원한다. 이렇게 무조건 몰아붙이는 건 싫다.라는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다그치기만 했고 눈물을 참으며 운동을 하고 와서는 밥을 먹으면서 설움이 복 받힌 거죠



으이그 이 멍청아! 지가 할 말도 못 하고 지질하게 집에 와서 울어?  왜 딱 잘라 말을 못 해? 나는 이런 식으로 운동 못해요! 라는 말을 못 하고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려니 속에서는 울화통이 치밀었어요. 나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어요, 입을 다물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나야말로 똥 멍청이다. 기어 다닐 때는 일어나라고 일어나면 걸으라고 걸으면 뛰라고 다그치기만 한 엄마가 떠올라서 오늘 이 시간까지 얘가 힘들어하는 거다. 채찍을 들고 있던 예전의 엄마와 필라테스 강사의 얼굴이 겹쳐 보인 거겠지. 힘들다고 말하면 참으라고만 했던 엄마와도 겹쳐 보였을 거고....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수희 님 나는 아이가 약한 마음을 내비치기라도 하면 험한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말했었어요. 그래 가지고는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요. 아이가 원하는 삶이 뭔지도 모르면서요, 딸애는 괴로운 심정을 솔직하게 말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부터는 자신의 마음을 말로 하지 않는 게 버릇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프면 아프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는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나라는 인간은 딸에게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많이도 주었던 것 같아요.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게 만드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을 일으킨 엄마, 그러면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고요. 아이가 우울증으로 고통받을 때 심리학 책을 정말 많이 읽었는데요. 오랜만에 심리학 책을 다시 꺼내 읽었어요.『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 은 어려운 의학 용어가 별로 없으면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통해 인간 내면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발견해 볼 수 있는 책이에요. 심리학 책이지만 졸리지 않고요.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 조커와 배트맨의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 흥미진진해요. 심리학 책이 지루할 수도 있는데 이 책은 아니에요.한번 읽어보라고 사람들 손에 들려주고 싶어요. 특히 아이에게 안전지대로서의 부모가 되고 싶다면 읽어도 좋을 책이에요



트라우를 겪은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트라우마의 고통과 괴로움, 상실감을 완화해줄 건강한 사회 공동체이다, 인내심이 강하고 포용적이며, 일관된 인간관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아이는 바르게 회복할 수 있다.



요즘 낙엽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한없이 가볍고 바스락 소리가 나는, 휭 날아 누군가의 마음에 척하고 붙는.... 쉽지 않네요.

그럼 또 봬요



2022.6.5

똥멍청이 김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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