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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Oct 01. 2023

경험은 늘 새롭다

원작보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영화를 먼저 봤다면 원작을 찾아서 보지 않는 편이다. 특히나 잘 만들어진 영화일수록 더 피하게 된다. 원작으로 인해 영화나 드라마로 받은 감동이 사라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책 대부분은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을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나 스스로 상상하고 재구성해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영상으로 접해진 줄거리는 다른 상상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미지가 내 머릿속 한편에 완전히 자리 잡아 오로지 한 장면으로만 남아버린다. 인간의 뇌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가끔은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마구잡이로 헝클어버리기도 한다.     


  공연을 좋아하지만 좀처럼 연극은 잘 보지 않는데 올해는 우연한 기회에 셰익스피어 연극을 영상으로 접하고 너무 좋아 두세 달에 한 번은 찾아보고 있다. 지역 연극축제에 영국 연극 리처드 3세가 초청되었다는 소식은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과는 다른 매력적이고 강한 억양을 감상하겠다는 아주 소박한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은 건 실수였다. 드디어 공연날 시작 시각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예매를 확인한 후 입구에서 기다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네? 너무 일찍 왔나요?”

“본 공연은 관객이 들어가자마자 바로 시작해서요. 여기서 잠시 대기해주시면 5분 전에 입장 도와드릴게요.”     

소극장에 대기실을 기대할 수는 없잖은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입장을 허락받기 위해 기다렸다. 공연은 표를 확인한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혼자 온 나는 뻘쭘하게 팔짱을 낀 채 서성였다. 잠시 후 영어로 진행되는 연극이니 간단한 줄거리를 설명해주셨다. 언젠가 읽었을 셰익스피어의 책을 열심히 떠올려보았다. 말, 말, 말, 독백, 독백, 독백. 영국 연극의 특징은 정말 대사가 길다. 그리고 많다. 살짝 겁이 났다. 사실 예매를 망설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누군들.  

   

 

드디어 입장이 시작되었으나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짧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빛은 이미 관객이 무슨 생각을 할지 예상한 듯했다. 객석에는 드문드문 명찰이 놓여있었는데 배우가 관객을 한 줄로 세운 후 관상을 보고? 자리를 지정해주었다. 관객이 스무 명 남짓이기에 다행이지 그렇다고 고분고분 그걸 다 받아줄 리도 없다. 나이 좀 먹었을 법한 아저씨들이 반칙을 거침없이 했다. 내 돈 주고 왔는데 입장도 마음대로 못하고 자리도 마음대로 못 앉는다니 얌전하게 순서를 기다린다는 건 과한 요구인지도 모르겠다. 앞사람의 자리를 고민하는 틈을 타 얼른 명찰이 없는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Hey madam?“ 

앗 저요? 

”Ye Sit here.“

네….

그렇게 나는 오늘 셰익스피어 연극에 출연을 확정 지었다.     


단정하지는 않았다. 반쯤 열어젖힌 재킷과 블랙진 그리고 제법 주름이 진 앵글 부츠. 빨간 넥타이에 다 채워지지 않은 흰 셔츠. 그는 오늘 리처드 3세이며 이 극을 오로지 혼자 끌고 갈 유일한 배우다.   

   

  무대 중앙 즈음 삐딱한 테이블에 포도주 한 병이 놓여있다. 반쯤 채워지다 만 포도주잔은 균형이 맞지 않지만 제법 잘 서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을 둘러싸고 큰 포스트잇 여러 장이 붙어있었다. 목에 건 빨간 줄의 명찰은 그 옛날 죄수가 찼던 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칼은 꽤 많은 관객의 목에도 걸려 있었다. 오늘 우린 모두 배우이기도 관객이기도 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을 법도 하지만 다들 즐거웠다. 지금까지는.      

  

 반쯤 기울어진 어깨에 이어진 팔은 허리춤에 걸쳐 바지 주머니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숨겨진 팔에 이어 다리마저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걸을 때마다 넘어질 법한 모습에 불안감은 더해졌다. 그 모습이 원래 자신의 모습인 듯 보였다. 심지어 계단을 오르내릴 때조차도 자세를 풀지 않았다. 독백을 읊조리다 누군가를 보며 내용은 모르겠지만 강하고 매력적인 악센트로 대화를 시도하고 허공을 보며 끝없이 독백을 이어갔다. 사실 배우 뒤 스크린에 한국어 대사가 띄어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방해되었다. 그의 표정만으로도 오롯이 전해오는 감정, 분노, 절망, 고독, 갈등. 욕망 그 모든 것들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언어는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었다.   

   

”자, 내가 빌려 드리리다 당신께 끝이 날카로운 이 칼을,

그러니 원하시면 그것을 심으시오 이 진정한 가슴에

그리고 보내주시오. 당신을 사모하는 영혼을, 

내 맨가슴을 그 치명적인 찌름에 맡기고 

무릎 꿇고 겸허히 죽음을 간청하오.“     

역할을 맡은 관객들이 하나둘 가슴에 분홍 포스트잇을 붙여나갔다. DEAD. 욕망으로 가득 차 온갖 계략으로 장애물을 하나씩 처리해나갔다. 그에게는 이제는 가족도 형제도 친구도 없다. 극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예수님, 자비를!

오 겁쟁이 양심, 왜 날 이리 괴롭히느냐?

빛이 유령처럼 푸르다. 지금은 정확히 한밤중

차갑고 두려운 방울이 곤두선다, 내 떨리는 살 위에.

내가 뭘 겁내는 거지? 나 자신? 곁에 아무도 없는데.

리처드는 리처드를 사랑해, 말하자면, 나는 나다.

여기 암살자가 있나? 없지. 있다, 내가 암살자니까.

그렇담 도망쳐야지! 뭐라, 나 자신으로부터? 말도 안 돼.

왜?

내가 복수할까 봐. 나 자신이 나 자신한테?

슬프다, 난 나 자신을 사랑하는데. 왜? 무슨 좋은 일을 해준 게 있나 나 자신이 나 자신한테?

오 없다, 슬프게도, 난 오히려 증오해 나 자신을

...

내가 죽으면 어느 영혼도 날 불쌍히 여기지 않겠지.

아니 그들이 왜 그러겠어? - 나 자신이     


삶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고통에 절규하는 모습으로 극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뚜벅뚜벅 나를 향해 걸어와 내게 말했다.      

내게 말 한 필을 주오.

말 한 필이면 내 왕국도 주리로다!     

”NO. NO. I can’t do that.“     


 원작에는 어떻게 쓰였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절망의 끝에 서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닫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은 암담했다. 어떻게든 왕좌를 지키겠다고 욕망에 휩싸여 극악무도하게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괴물의 모습이 아닌 죽음을 피하고자 몸부림치는 나약한 인간. 오히려 그가 안쓰러웠다. 바닥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야 그는 육체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제야 주머니에서 구겨져 있던 하얀 손이 빛을 보았고 굽어 있던 어깨가 펴졌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 순간을 위해 그 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는가.     

그렇게 극이 끝나고서야 내 역할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수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관객이 일어나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배우에서 한 여인으로 돌아왔다.      


원작의 규칙을 깬 건 셰익스피어가 유일했다. 희곡은 정말이지 읽기가 쉽지 않았다. 한순간의 감정을 반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에 걸쳐 풀어낸 수많은 단어는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극이나 영화로 접한 셰익스피어는 정말 천재라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됐다. 그런데 이 룰도 깨졌다. 오늘.     


영국인들도 어렵다는 셰익스피어가 자신에게는 너무나 편안해서 어떻게든 쉽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인간이 어떻게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시간과 삶을 이렇게까지 쏟아부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내가 생각하는 대가와 그가 생각하는 건 다를 수 있겠지만 하나의 극을 전 세계를 다니며 200회 이상 공연해왔다는 그에게서 숙연함을 느꼈다. 나는 그 무엇에 간절함을 갖고 있는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은 그녀를 좀 더 볼 수 있다는 감사함에 그리고 그렇게 열정을 쏟아부은 배우에 대한 예의라 여겨져 자리를 좀 더 지키게 되었다. 아직 감동이 사라지지 않은 듯 질문이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원래 한국인은 질문을 싫어하지 않은가. 특히 충청도는 더더욱. 그러나 이 또한 오해였다. 연극보다 더 길어진 대화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Emily Carding. E는 이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있었고 몇몇 정말 껄끄럽고 예의 없는 질문을 제외하면 나도 무척 좋았다.

      

명찰을 반납하며 덥석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 땀으로 젖어있고 따뜻했다. 그리고 무척 마른 작은 손이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 배우를 향한 존경과 감사가 전해질 수 있도록 진심을 담았다. 그녀 또한 나를 보며 고맙다며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쩌면 극의 중간중간 마주치던 눈빛에서 나의 진심이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않았다. 

한 발 한 발을 꾹꾹 눌러 밟으며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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