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억을 떠올리는 방법
내가 제일 싫어하는 책 제목
느림의 미학
느리게 사는 즐거움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느리게 걷는 미술관
...
느리다
20대 내 주특기는 7cm 힐을 신고 깜박이는 건널목을 달려 건너는 것이었다. 멀리서 버스가 보여도 놓치는 법이 없었고 과장님이 업무를 지시하기 전에 미리 처리하고 신속하게 보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불어 회식 자리에서는 옆자리 앉은 사람 술잔은 거의 비워지지 않았고 다이어리는 아주 빈틈없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목표를 설정하고 전력 질주로 성취해나가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그런 내게 ‘느림’이란 본능적으로 온몸의 세포가 거부하는 단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딱 하나 아주 천천히 떠올리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만큼은 느리면 느릴수록 더 좋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첫 놀이는 동생이랑 개울물에 종이배를 띄우는 장면이다. 엄마는 늘 주인집 텃밭에 일하러 나가셨고 나는 두 살 어린 동생과 함께 열심히 종이배를 접었다. 고사리손으로 접은 종이배가 얼마나 물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종이배가 떠내려가는 동안 동생이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종이배를 따라가고 어쩌다 뒤집히면 그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물에 빠져 생명이 다한 것처럼 슬펐다.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위태로운 자세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종이배는 어쩌면 내 마음 같았다. 엄마없이 동생을 종일 봐야한다는 부담감과 동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둘이 의지해서 이리저리 다니는 불안함은 5살 어린 여자아이에겐 아마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숲과 들에 이름 모를 곤충과 풀이 내 유일한 친구였다.
한참을 놀다가 동생 손을 잡고 또 한참을 걸어 가까운 점방에 갔다. 물건도 몇 개 안 되는 비좁은 가게에서 우리의 선택은 오로지 새우깡. 새우깡 한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동생 손을 잡고 또 먼 길을 돌아 집에 왔다. 오는 길에 동생이랑 하나씩 먹는 새우깡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안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줄어드는 과자를 보는 내 마음은 어쩌면 엄마가 없는 빈자리가 커지는 것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과자가 다 비워지면 어느새 멀리서 한편에 소쿠리를 들고 익숙한 꽃무늬 모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먼 시절을 돌아 엄마가 된 지금 주방 싱크대 아래 비밀공간에 과자 상자가 있다. 보이면 더 먹고 싶다고 보이지 않는 깊은 구석에 숨겨놓고 간절히 생각이 날 때만 꺼내먹는 보물창고다. 그곳에 나의 옛 추억이 남긴 새우깡은 늘 떨어지지 않는다. 한 봉지를 열면 아끼고 아껴서 5~6번에 나눠 먹는다. 그 시절 엄마의 꽃무늬 모자처럼 익숙한 과자 봉지가 좋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두 손으로 양쪽을 꽉 잡고 예쁘게 뜯으면 신선한 새우 향이 들숨과 함께 훅 들어온다. 새우깡의 원조는 일본 새우깡이라지만 그 멀리 일본까지 가서 먹었던 새우깡은 그 시절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이제 먹을 것이 넘쳐나고 굳이 하나씩 아껴가며 먹지 않아도 되지만 아직도 새우깡은 내게 그 시절 아련한 소중한 추억이다. 한 순간에 다 먹어버리면 마치 그 시간이 홀연히 날아가버릴 것만 같아 줄어드는 과자가 안타깝다.
과자 컵에 조금만 담아 하나씩 하나씩 아껴가며 먹는다. 그 시절 동생과 함께 종이배를 띄우던 기억이 행복하지만 않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시리도록 푸른 그 시냇물에 이제는 종이배를 띄울 수 없어서일까?
PS. 내게 있어 느린 걸 찾아보니 오로지 새우깡을 먹는 그 순간이었다. 본능적으로 느린 걸 거부하는 내게 있어 유일한 순간이 오직 그 과자를 먹는 시간이라니. 언젠가 새우깡 파동으로 한동안 입에 대지 못했었다. 누구나 알고 있을만한 그 사건. 그때 이와 비슷한 류의 과자를 찾아 아쉬움을 달랬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서글프나 그래도 내게 안식을 주는 먹을거리가 있어 감사하다. 내사랑 새우깡~
사진은 국립세종수목원 사계절온실
#나보쓰 #라이팅미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