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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이 되어서야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었다.
욕심이 많아서였는지, 그저 운 때가 맞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주변 친구들이 하는 보통의 연애가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취준 기간이 길어지면서 꽃다운 청춘을 도서관에서 썩히고 있다는 슬픔과 억울함에 마음은 병들었고, 불안한 미래 앞에서는 상대방의 작은 실수도 용서해줄 자비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반짝 들 때, 연애가 시작되고 곧 끝이 나곤 했다.
건강한 연애는 단순히 취준에 성공했다고 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불안한 마음에 뿌리를 내린 연애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덕분에 가능했다.
취준에 성공하기까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믿음과 의지가 생겼다. 그러고 나니 정작 시간과 마음을 더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연애를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인생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을 느끼면서 마음의 허기가 채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 같은 소개팅을 받게 되었다.
취준을 막 시작하던 때,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 취소했던 소개팅을 4년이 지난 때 우연한 계기로 다시 하게 됐다. 주선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점도 재미있었다.
소개팅남이 마음에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급하지가 않았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면 만나겠지만 굳이 지지고 볶는 만남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서도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는 생각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서두르고 재촉하며 마음 졸이다 관계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맞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는 생각, 즉 내 마음에 드디어 자리 잡은 소중한 '자존감'은 건강한 연애를 시작하게 하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와의 소개팅은 참신했다.
강남역 12번 출구 앞에서 만나자더니 조금 늦는다고 연락이 왔다. 12번 출구로 올라오는 수많은 남자들을 보면서 이들 중 누구일까, 모르는 얼굴을 찾느라 바빴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계단을 허둥지둥 올라오는 한 사람을 딱 보자마자 입꼬리가 허락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소개팅에서는 당연히 파스타나 피자, 아무튼 양식집에 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대뜸 "자취하신다고 했나요? 그럼 한식집도 괜찮으세요?"라고 했다. 소개팅에 한식이라니... 참신했다. 그와의 대화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무조건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나 부담이 없었으니 가능했다. 나 혼자서도 온전하다는 자존감이 든든하게 지켜주니 당당하게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몇 번의 약속과 즉흥적인 만남이 있고 난 어느 날 밤,
그는 아르바이트를 마친 나를 기다려 집 앞까지 굳이 데려다준다고 나섰다. 지친 하루의 끝을 지켜준 그는 어쩐 일인지 머뭇거리다, 우리 제대로 만나보자고 말했다.
그와의 만남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가 마음에 들었지만, 둘 다 성격이 강한 탓에 우리가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평화롭게 만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한참을 서서 고민하는 나를 보고 그가 결정타를 날렸다.
내가 다 져줄 테니, 일단 한 번 만나봐!
그때 그의 약속은 우리의 시작을 여는 열쇠이자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부부의 행복을 지켜주는 마법 같은 주문이 되어 있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방에게 희생을 강요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의 자존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건강한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자존감이 기반이 되지 않는 관계는 자격지심이나 집착과 같은 부작용으로 이어지고, 필히 어느 한쪽으로 기울다 넘어지는 연애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만족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나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방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되어 서 있을 때, 우리는 건강한 연애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는 생각이 이기심이 아닌 자존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생각, 찬성이다! 당신과 똑 닮은 튼튼한 자존감을 가지고 당신의 생각을 응원해주는 보석 같은 짝꿍을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