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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Jul 10. 2024

좋은 시간, 나쁜 여자(26)

26. 덫에 걸린 남자

 캐리어 두 개를 양손으로 끌고, 배낭하나를 짊어진 채 기숙사 현관문을 들어서는 성주. ‘아, 역시 학교 냄새가 좋아. 얼마 만에 맡아보는 캠퍼스 공기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침점호에 전투복, 보이는 건 산과 거친 남자들의 숨소리뿐이었는데.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캠퍼스 룩은 짧은 미니스커트에 과잠이라!’ 성주의 눈은 마냥 즐거웠다. 2학년 1학기 복학. ‘21학번 여학생 동기들은 벌써 4학년이었다. 성주의 2학년 1학기 생활은 인천 송도캠퍼스에서 시작했다. 3, 4학년은 신촌캠퍼스로 가니 ’ 21학번 동기들을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2년 후배들과 같이 학교에 다닌다는 것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개강일. 첫 수업인 경영학개론 강의실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한번 강의실 번호를 확인하고 창가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강의실에 들어오는 한 명 한 명을 지켜보리라. 시계를 보니 09:40분이었다. ‘내가 너무 빨리 왔나?’, 잠시 후 강의실 문이 열렸다. 성주는 본능적으로 출입문을 쳐다봤다.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살짝 머금은 미소와 긴 생머리, 옅은 화장으로 화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얀 양볼은 광채를 머금었고, 청바지와 흰 티, 그 위에 과잠을 입은 모습은 성주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다고 시선을 맞추지도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학생은 어느새 성주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안녕하세요. 23학번 김현경이예요. 예비역 선배님이시죠?”

헉, 어떻게 알아봤을까. 성주는 얼른 입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예, 21학. 성주.”

“네? 뭐라고요?”

“아, 그러니까…. 나는 21학번, 김성주.”

성주는 여자 앞에서 말을 더듬기는 처음이었다. 아직 군대물이 안 빠져서 그런가? 쪽팔리게 말까지 더듬었다.

“아, 네. 21학번 김성주 선배님. 일찍 오셨네요. 제가 1등이었는데 오늘은 선배님한테 밀렸네요.”

“어, 미안한데…. 내일부터는 15분 전에 올게요.”

“호호. 그것도 빠른데요.”

“그럼 10분.”

“농담입니다. 선배님. 괜찮아요.”

현경은 성주에게 활짝 웃음을 보여주고 강의실 중앙 제일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성주는 현경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않았다. ‘참 예쁘다, 어쩌면 운명의 여인이 저 후배일 수도….’ 수업시간 내내 성주는 현경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쉬는 시간에도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눈이 움직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쫑긋했고, 무슨 말에 웃고, 말할 때 손은 어떻게 두는지, 누구와 친한지, 화장실에는 몇 번을 가는지 등등. 온종일 바라보라고 해도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김성주. 전역했구나!”

고요한 성주의 현경 바라기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돌려 바라보니 성주와 같은 학번 상철이었다. 

“상철아, 복학했구나? 전역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반갑다. 반가워.”

“야야, 저기 봐봐.”

“어디?”

“저기 맨 앞줄에 과잠입은 애!”

성주는 상철이 가리키는 애가 한참 넋을 놓고 바라봤던 현경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야, 상철! 너 나 믿지?”

“뭔 소리야?”

“친구로서 나를 존중할 줄 아는 널 나는 존경한다는 말이야.”

“뭔 말?”

“내가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저기 과잠 입은 애. 이름은 김현경, 23학번. 곧 나의 여자 친구가 될 몸이다 이거지. 날 존중하는 만큼 인정해라.”

“하, 빠르다 빨라. 언제 이름까지 알아냈냐?”

“빨리 대답해. 인정한다고. 그리고 다시는 네 형수님에게 눈독 들이지 않겠다고.”

“짜식, 알았다. 내가 양보한다. 그런데 네가 안 되면 바로 내가 대시한다.”

“하하하, 그럴 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없을 걸!”

“하여튼 반갑다. 반가워. 나도 이제 외롭지 않겠다.”

상철은 성주와 티키타카가 잘되는 친구였다. 1학년을 같이 지내면서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다. 상철이는 해병대를 지원했고, 성주는 육군을 지원했었다. 둘은 휴가 기간을 한 번도 제대로 맞춰서 나오지 못했다. 군 생활 1년을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휴가가 통제되고 면회조차 되지 않는 시간을 보냈었다. 그다음 1년은 거리 두기가 해제되어 휴가도 나왔지만 번번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었다. 둘은 수업 끝나면 학교 근처 맥주집에서 오래간만에 술 한잔 하기로 했다. 성주는 수업 내내 현경만 바라봤다. 상철이가 옆에서 속삭이며 말을 걸어도 눈은 현경이에게만 맞춰졌다. 

“성주야, 너 진짜 저 애한테 반했구나?”

“상철. 내 고요한 바라기를 방해하지 마라.”

“바라만 보면 뭐 하냐? 다른 놈이 낚아채기 전에 가서 말을 걸어야지.”

“아니야.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해. 그냥 다가가서 말 걸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나한테 다 전략이 있어. 내가 그냥 바라만 본 줄 아냐? 다 생각하고 있었어.”

“어떻게 할 건데? 궁금해지는데!”

“일주일.”

“일주일? 일주일 안에 꼬신다고?”

“아니. 일주일만 바라본다고.”

“뭐, 텔레파시라도 쏘겠다는 거냐?”

“그렇지. 일주일 동안 나에게 오라고 텔레파시를 보낼 거야.”

“왜 장풍으로 끌어당기겠다고도 말하지 그래.”

“고차원적인 사랑의 텔레파시는 반드시 마음을 움직이게 되어 있어.”

“하하하 너 군대에서 머리를 심하게 다친 거 아니냐?”

“상철. 구름을 움직이는 게 뭐지?”
 “그야 바람이지. 바람 없이는 구름이 움직이지 않지.”

“그래 맞아. 그럼, 사람을 움직이는 게 뭔지 아니?”

“사람을 움직이는 건…. 돈, 돈이겠지?”

“틀렸어. 사람을 움직이는 건 사랑이야. 그래서 내가 사랑의 텔레파시를 쏘겠다는 거야.”

“야, 묘하게 설득되기는 한데 과연 그럴까?”

성주는 진짜 일주일간 인사만 건네고 계속 바라만 봤다. 다른 어떤 말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일주일이 지나고 다음 월요일 수업시간. 여느 때처럼 성주가 20분 먼저 와서 교실에 앉았다. 두 번째로 현경이가 들어왔는데 중앙 제일 앞자리가 아니라 성주가 앉아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성주는 현경이 다가오는 소리만큼 심장박동소리가 커져갔다. 

“선배. 옆에 앉아도 돼요?”

“당연하지. 1년 8개월 하고 일주일을 더 기다렸는데.”

“호호호. 뭐라고요? 1년 8개월 하고 일주일요?”

“그 시간을 어떻게 기다렸는지 차차 알게 될 거야.”

“호호호. 재밌네요. 궁금해지는데요?”

“오늘은 1탄. 수업 끝나고 소맥 시원하게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해 줄게.”

“우왕, 기대해도 되죠?”

“그럼. 마지막 수업이 뭐야?”

“서양철학 교양수업요.”

“몇 시에 끝나?”

“응, 5시에 끝나요.”

“그럼 이리로 와.”

성주는 노트에 ‘5시 30분, 아름다운 세상 호프집’이라고 썼다.

“네. 거기 알아요. 선배는 몇 시 수업이에요?”

“난 오늘 이 수업 밖에 없어.”

“어떻게 하루에 한 과목밖에 없어요?”

“아니, 나머지 2개 과목은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니까 수업이 될 리가 없지.”

“호호호, 이런 거구나. 플러팅 한다는 게.”

“난 진심이다.”

“저도 진심이에요.”

그 순간 교수가 들어왔다. 성주는 노트를 현경이 잘 보이도록 펼쳤다. 필담으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둘은 그렇게 강의시간 내내 쓰고, 댓글 달고, 미소 짓고, 쳐다보고를 반복했다.      

오후 5시 20분.

성주는 10분 전에 호프집 입구에 도착했다. 누굴 기다린다는 게 얼마만인가! 먼저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서로 찾지 않아도 되고, 같이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현경은 정확히 오후 5시 30분에 도착했다. 성주는 손을 과도하게 흔들었다. 멀리서 보면 유격훈련 팔 벌려 뛰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경은 그 모습이 너무 웃겼다. 멀리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걸어오는 현경의 모습을 보고 성주도 웃었다.

“여기야.”

“알아요.”

“100미터 전부터 넌 줄 알았어.”

“눈도 좋은가 봐요.”

“아니, 내 가슴이 마구 뛰더라.”

“또, 또 플러팅 한다.”

“어쩔 수 없어. 내 눈보다 가슴이 더 빠른걸.”

“호호호. 들어가요.”

“그래.”

둘은 쏘세시 야채볶음 안주에 생맥주 1,000CC부터 시작했다. 복학하니까 어떠냐는 질문에, 군대 생활 이야기에, 영화를 좋아하느냐, 수업 끝나면 뭐 하는지 등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화가 잠시 중단될 때는 그윽한 눈으로 서로 바라보며 잔을 기울였다. 

“선배.”

“왜?”

“노래 잘해요?”

“내 노래를 듣고 싶은 거야? 네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 거야?”

“철학적이네요.”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노래 안 해.”

“그래서요?”

“가자는 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불러주려고 연습한 노래가 있거든.”

“정말요? 궁금하다.”

“지금 갈까?”

“네.”

테이블 위에는 맥주 4,000CC가 빈 잔으로 놓여있었다. 딱 좋을 만큼 얼큰하게 취해서 나가는 두 사람은 어느새 손을 잡고 있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오는 짜릿함이 만들어내는 느낌. 지나가는 사람,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 네온사인 불빛은 그냥 배경이었다. 세상에 두 사람만 느껴졌다. 성주는 노래방에서 ‘나에게로의 초대’를 불렀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꼭 불러주겠다고 연습한 노래였다. 옛날 노래지만 현경은 가사와 성주의 표정에 집중했다. 가사, 몸짓, 노랫소리 하나하나가 그대로 큐피드의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사랑에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그런 현경을 보며 성주는 한 마리 나비가 장미꽃 위를 날며 꽃잎에 앉았다가 날았다가를 반복하듯 추임새까지 넣었다.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푹 빠져버렸다. 한 시간을 노래방에서 서로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로를 쳐다보며 헤어지기가 아쉬운 눈빛을 교환했다. 용기는 현경이가 더 많았다.

“선배. 나, 오늘 선배랑 같이 있고 싶어.”

“나도.”

둘의 발걸음은 설렘과 본능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목적지에 다다르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현경의 가슴은 부풀었고 성주의 호흡은 이미 거칠어졌다. 야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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