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하늘을 보며 좋은 추억을 떠올려 보자!
“혹시, 송은섭?”
“아, 네. 소개팅…. 김혜인?”
사회복지학과 1학년 퀸카. 그녀는 늘 내 맘을 설레게 했다. 마침 그녀를 아는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있어서 소개해 달라고 3개월을 졸랐다. 녀석도 그녀를 좋아했는지 매번 알았다고 말만 했다. 녀석은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10월에 군대에 갔다. 입대 전 선물이라며 소개팅을 주선해 줬다.
카페에는 가수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앞에 살포시 앉은 그녀는 한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멈추고 꽃 위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일까? 두근거리는 가슴과 어질어질하도록 황홀한 기분은 내 온몸 세포에 사랑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었다.
“고마워. 나와 줘서.”
“고맙긴. 나도 너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어.”
“정말? 이거 너무 황송한데.”
“동호한테 너 이야기 많이 들었어. 남자가 봐도 괜찮은 놈이라고 하더라.”
“어, 동호가 그랬어? 자식, 동호가 사람 볼 줄 안다니까. 하하하.”
처음 만난 사이 같지 않게 우리는 티키타카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던 중 그녀가 결정적인 질문을 했다. 아마 우리가 그 가을을 아름답게 보낸 이유가 거기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 그거 알아?”
“뭐?”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
여자가 이런 질문을 할 때면 뭔가 원하는 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책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을 소환했다.
“꽃에 비유하면 설명이 될 거 같은데.”
“꽃?”
“응, 꽃을 좋아하면 어떻게 하니? 꺽지. 향기를 맡아보고 싶거나 옆에 두고 싶어서. 그런데 꽃을 사랑하면 물을 주게 돼. 정성스럽게 돌보면서 오래오래 보고 싶은 거지. 그 차이라고 생각해.”
“음…. 멋지다.”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진 대답이었다. 이 말은 그녀가 자랑삼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난 정외과의 로맨티시스트가 되었다. 당시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가을의 전설>을 빗대어 나의 말은 <사랑의 전설>로 남았다.
오랜만에 집 앞 공원 잔디에 누워 가을 하늘을 바라봤다. 단풍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감았다. 30년 전 가을 하늘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 지금 사랑의 전설 생각하고 있지?”
“난, 그때만 생각하면 왜 이렇게 좋을까?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그렇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아내는 그때 그 질문을 던졌던 그녀다.
사람의 인연은 참 묘하다. 싸워서 헤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건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공유하는 데서 오는 신뢰라는 생각이 든다.
2024년의 가을 하늘이 1994년의 가을 하늘을 불러냈다. 그때 잡은 아내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좋은 질문을 해서 내가 좋은 답을 한 거야. 나한테는 당신이 전설이야.”
가끔은 하늘을 보며 좋은 추억을 되새겨 보자.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단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