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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Apr 03. 2024

좋은 시간, 나쁜 여자(20)

20. 엄마와 딸

영혼은 영혼을 알아본다. 하지만 한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 건 하나의 영혼뿐이다. 두 영혼이 들어가 있더라도 하나가 나타나면 하나는 나타날 수 없다. 육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지금 깨어있는 영혼을 밀어내야 한다. 지영은 현경의 영혼이 꿈틀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딸의 인생인데, 딸의 육체를 딸이 다시 찾겠다고 몸부림치는데…. 지영은 지금의 행복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영은 늦기전에, 현경이 자신을 알아보기 전에 현경의 육체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찾은 사랑인데, 벌써 이별을 해야하는 자신의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지영은 벌떡 일어나서 앉았다. 정호는 지영의 갑작스런 행동에 자신도 일어나서 지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호 씨. 잘 들어.”

“지영아,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무섭게.”     

정호는 갑자기 일어나 앉아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지영의 모습에서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자 지영은 정호의 두 손을 잡고 정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사람의 육체에는 여러 영혼이 들어갈 수 있어. 그런데 육체를 움직이는 건 하나의 영혼만 가능해. 만약, 다른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려고 들면 영혼끼리 다툼이 벌어지지. 그 싸움에서 승자가 결정되지 않으면 육체는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한다던가, 엉뚱한 행동을 하게 돼. 흔히,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게 바로 그런 상태야. 귀신이 멀쩡한 산사람의 영혼을 잡고 흔드는 거지.”

“지영아, 그런데 지금 왜 그런 말을 해?”

“그게 말야, 지금, 이 육체의 잠들었던 주인이 깨어나려고 해. 원래 영혼이 깨어나면 난 당연히 나가야 해. 그게 순리거든. 내 육체도 아닌데 들어와서 주인행세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야. 그래서 지금부터는 24시간 지영이가 아니라 아가씨가 되었다가 내가 되었다가 그럴 수도 있어.”

“그럼 현경이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면 지영이 넌 어디 있는 거야?”

“현경이가 나오면 난 나가야 돼. 그런데 지금 현경이 영혼을 보니까 아직 완전히 육체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가 않아. 그럴 때는 내가 다시 나올 수도 있어. 아마도 당분간은 현경이 육체 속에 있을 수 있을 거 같아. 하지만 언제라도 빛이 내려와 날 데려가면 그때는 당신한테 떠난다는 말도 못하고 갈 수도 있어. 만약, 내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영원히 당신 곁을 떠났다고 생각해줘.”     

정호는 혼란스러웠다. 현경의 몸에 지영의 영혼이 들어간 것부터 겨우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다시 현경이가 나온다고 하니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지영은 아무런 말도 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정호는 지영을 바로 눕혔다. ‘만약, 지금 현경이가 나온다면 발가벗은 몸으로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볼텐데.’ 정호는 얼른 옷을 입혔다. 자신도 옷을 입고 격정의 흔적들을 치웠다. 그러고 난 후 식탁에 앉아 합격을 축하하는 파티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모든 것을 현경이가 쓰던 그대로 정리한 후 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사라진 지영이의 영혼은 어디로 갔는지, 현경이는 왜 깨어나지 않는지.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에 지쳐 와인을 한 모금 마시려는 차에 현경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정호는 얼른 침대로 가서 현경이의 손을 잡았다.      

“현경아, 현경아. 정신이 들어?”

“….”     

현경의 입술은 조금씩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말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경아, 눈을 떠 봐. 내 말 들려?”

“….”     

현경이 머리가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더니 가냘픈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정호는 다시 현경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현경아, 이제 정신이 들어? 내 말 들려? 내가 누군지 알아 보겠어?”

“키, 키다리, 아, 아저, 씨.”

“그래.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구나. 다행이다. 다행이야.”     

현경은 자신이 왜 누워있는지, 무슨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다가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정호는 현경의 등을 받쳐들고 천천히 침대 위에 앉혔다.      

“아저씨. 어떻게 된거에요? 사고나는 것 까지는 흐릿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 기억하려고 애쓰지는 마.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아저씨가 알려줄게.”     

현경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저씨. 배고파요.”

“안 그래도 식탁에 차려 놨으니까 가서 먹자.”     

현경은 일어나서 식탁으로 걸어가는데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디디며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식탁 위에 케익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달콤했다. 기운이 조금씩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랫도리는 촉촉한 뭔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현경은 먹다말고 화장실로 갔다. 반바지를 내리고 팬티를 내리자 팬티에 점액질이 젖어 있었다. 얼른 화장지로 닦아내고 선반에서 생리대를 꺼내서 착용했다. 현경은 자신의 기억이 죽어있는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바로 조금 전까지 무슨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설마, 아저씨가 나를? 에이 아닐거야. 아저씨가 어떻게 나를. 그럼 이건 뭐지? 분명히 정액인데? 내가 깨어나기 전에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저씨, 왜 그랬어요. 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저 태연한 얼굴은 뭐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런 얼굴. 이건 분명히 정액이 맞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에이, 모르겠다. 그냥 물어보자.’

현경은 물을 내리고 손을 씻은 다음 물로 눈 주위를 문질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에는 비누를 묻혀서 세수를 했다. 아저씨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다. 그때 아저씨는 분명히 원조교제를 목적으로 만났었다. 자신을 침대에 묶어놓고 변태 짓을 하다가 갑자기 중단하며 다른 방향으로 자신을 몰고갔던 기억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밖에서 정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경아, 괜찮니?”     

현경은 수도를 잠그면서 혹시 정호가 화장실로 들어올까 봐 바로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금방 나갈게요.”     

현경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거울 속에 자신을 다시 한 번 관찰했다.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거울 속에 있는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아. 낮설다. 그래, 잃어버린 기억을 하나씩 찾아보자.’ 현경은 식탁에 다시 앉아서 사고 난 이후의 시간에 대해 궁금하다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바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사고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해서 자신과 관계를 하게 되었는지까지 하나씩 알아가고 싶었다.


“아저씨. 이 와인은 뭐고, 뭘 축하하는 자리인 것 같은데요?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응, 사실은 오늘 축하하는 자리 맞아. 네가 Y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했거든. 합격자 발표 1달 전에 사고가 났어. 계속 병원에 누워있었고.”

“그럼 제가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누워 있었어요?”     

현경은 다시 물으면서 속으로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의식이 없는 나에게 성행위를 했단 건가?’ 현경은 정호의 눈을 또렷하게 바라봤다. 증오와 원망의 눈빛이 한꺼번에 담겨 있었다.     

“응. 그게 말야. 네가 믿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네가 계속 누워만 있었던 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기억이 없어요. 제가 몽류병 환자처럼 돌아다녔어요?” 

“그게 아니고.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아, 참 답답해 미치겠네.”

“괜찮아요. 나 충격 안받을테니까 말해줘요. 무슨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게. 빙의. 다른 영혼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었어.”

“다른 영혼요?”

“그래. 다른 영혼. 그런데 그 영혼이 마침 내 첫사랑이었어.”

“첫사랑요?”

“그날 병원 응급실에 교통사고로 들어온 환자가 세명이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죽었었어. 넌, 의식이 없었고.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래. 이지영. 내 첫사랑 이지영이 거기서 죽었는데 영혼이 네 몸속으로 들어가 버린거야. 나도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 수가 있냐고 안 믿었었어. 그런데 나하고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말하는 걸 듣고 보니 안 믿을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응, 일단은 네가 깨어나지 않았고, 첫사랑 영혼은 네 몸을 빌려서 다시 나와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내 몸을 가지고 섹스를 한 거에요? 말도 안 돼.”

“아니.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 나도 너무 불편했어. 몸은 현경인데 영혼은 지영이야, 나도 괴로웠다고.”

“잠깐, 첫사랑 이름이 뭐라고요?”

“왜 그래? 이, 이지영.”

“엄마 이름이 이지영이에요.”

“그건 나도 알아.”

“아저씨가 울 엄마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어, 그게 말야….”     

정호는 현경에게 엄마의 죽음을 알려야 하나 망설였다. 현경이 충격을 받을 것만 같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시 충격을 주게 될 것이었다.     

“아저씨. 말해 봐요. 울 엄마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다른 영혼, 그 영혼, 첫사랑도 지영이에요?”     

정호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그래, 이제 현경이도 알아야 돼. 충격을 받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돼.’ 정호는 현경 엄마의 죽음과 장례를 치른 일까지 말하기로 작정했다.     

“현경아, 놀라지 말고 들어.”

“지금까지 놀랐는데 더 놀랄 일이 있어요? 얼른 말해줘요?”

“엄마는 네가 있던 응급실에서 다른 교통사고 사망자 중 한 사람이셨어. 네 옆에서 돌아가셨어. 나도 나중에 알았는데,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네 보호자를 찾던 중 네 엄마가 응급실에서 조금 전 돌아가셨다고 해서 갔더니 이미 사망진단이 내려졌고 영안실에 있었어.”

“아저씨, 거짓말이죠. 엄마가 죽었는 말, 거짓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엄마는 내가 화장해서 납골당에 모셔놨어. 네가 깨어나면 함께 가려고 했어. 그래서 네 엄마 이름을 알게 된거야. 내 첫사랑 이름과도 같았고.”     

현경은 정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가 죽다니, 엄마가 죽다니.’ 현경의 울음은 그치지 않고 점점 커졌다. 급기야 숨을 헐떡이며 꺼이꺼이 우는 모습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현경아 괜찮니? 여기 물좀 마셔봐.”     

현경의 눈은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흰 자위만 희번덕 거리며 까뒤집어졌다. 그리고 바로 실신해버렸다. 정호는 놀라서 현경을 침대에 눕히고 심장이 뛰는지, 숨을 쉬고 있는지 귀를 가져다 대어보았다. 다행히 숨도 쉬고 심장도 뛰었다. 한참을 의식이 없이 누워 있던 현경이가 눈을 떴다. 그리고 정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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