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녀온 것이 언제였는지 떠올려 본다. 2020년 3월, 뉴욕행 항공권과 숙소 예약을 취소할 때만 해도 우리 가족은 그저 계획했던 여행이 몇 달 뒤로 미뤄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론가 떠나는 기분을 잊고 지낸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왠지 서글프다. 괜스레 앨범을 꺼내어 정성껏 남겨놓은 여행의 흔적들을 뒤적이다가, 문득 오래된 옛 여행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7년 간 몸 담았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 가량의 “합법적인" 백수 생활 중이었다. 오랜 시간 꿈꿔왔던 퇴사를 비로소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고,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 회사 송별회가 있던 날, 술기운에 벌게진 얼굴로 집에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딱 3일만 혼자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고, 어디에 다녀오고 싶으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슬램덩크의 동네"
90년대 초, 슬램덩크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를 열광하게 했다. 만화를 보며 농구를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슬램덩크 속 농구는 역동적이면서도 디테일하고 스타일리시했다. 만화를 읽는 내내 나는 슬램덩크 속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일본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짜릿했던 농구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그 동네. 아직도 강백호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만 같은 그곳에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도쿄에 도착한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으로 유명한 "가마쿠라"에 가보는 것 말고는 딱히 계획이랄 것도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오다이바 해변에서는 나무 데크에 걸터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소설책을 읽었고, 걷다가 배가 고프면 눈에 띄는 라멘집에 들어갔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낯선 언어와 바쁘게 삶을 꾸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 혼자만 “이방인"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그렇게 한동안 게으름을 피우다가, 오후 늦게 하코네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하코네에 도착해서는 인근의 노천 온천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패키지가 포함된 저렴한 1인용 숙소를 골랐다. 비록 갈아입을 옷을 챙겨 숙소 바깥으로 10분 정도 걸어가야 했지만, 나는 급할 것이 없는 여행자였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산자락의 경치를 천천히 감상하면서 뜨거운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금세 어두워진 산골 마을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가족들의 얼굴과, 이런저런 상념들이 멋대로 머릿속을 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다음날에는 지도를 검색해 “가마쿠라코코마에 (가마쿠라 고등학교 앞)”라는 이름의 역을 찾아 길을 나섰다. 가마쿠라 고등학교는 슬램덩크에 나오는 여러 학교 중 하나인 "능남고교"의 배경이 되는 곳인데, 강백호와 북산고교 선수들이 연습 경기를 하기 위해 자그마한 전차를 타고 나란히 앉아가던 바로 그 곳이다. 하코네에서 버스와 열차를 갈아타고 후지사와라는 곳에 도착하면 바로 그 전차 "에노덴"을 만날 수 있다.
에노덴을 보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마치 슬램덩크의 이야기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양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차가 출발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덧 창 밖으로 탁 트인 해변이 펼쳐지면서 목적지인 가마쿠라코코마에를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평일 낮 시간의 승강장은 한가롭기 이를 데 없었고, 전차에서 내려 천천히 걷던 나는, 익숙한 철길 건널목 앞에서 이내 내가 찾던 바로 그곳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마쿠라 고등학교로 발길을 옮기려던 순간, 해변가에서 무언가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철길 너머 해변에는 서퍼 여럿이 파도에 몸을 맡기거나 더러는 백사장에서 쉬고 있었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으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자니 누군가 내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사진 찍어줄까?” 휴식을 취하던 서퍼 둘이 셀카를 찍는 나를 보고 다가왔다. 둘 중 하나는 이곳 가마쿠라에 산다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일본인이었고, 또 다른 이는 일주일 전에 일본에 도착한 스무 살 프랑스 청년이라고 했다.
며칠 전에 이곳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그들은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보이는 일본인은 놀랍게도 이제 곧 환갑을 앞두고 있다고 했고, 프랑스 청년은 서핑 하기 좋은 파도를 찾아 매 년 이곳저곳을 여행 한다고 했다. 나도 처음 보는 그들에게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내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고, 우리 셋은 대수롭지 않은 주제에도 신이 나서 맞장구치는 이른바 “낯선곳에서 마주친 이방인들의 대화”를 한참동안 이어갔다. 그들이 다시 파도를 타러 떠난 뒤에도, 나는 잠시 더 모래사장에 앉아 그들이 서핑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전날 읽던 책을 꺼내어 마저 읽었다.
좋은 것을 구경하고,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이방인의 시간"을 느끼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그때의 나는, 짧은 3일 동안 일상에서 한 발 물러난 듯한 느낌의 시간을 살아보고 싶었다. 느릿하고, 무계획하며, 즉흥적인 것들로 하루를 채우는, 온전한 내가 되어 하루를 사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부디 새해에는 다시 그때와 같은 무더운 여름날의 게으른 여행을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