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망한 것 같았던 나의 여행 이야기
수년 전 어느 여름. 나는 마추픽추에 있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날의 마추픽추는 오래도록 버킷리스트에 담아 두었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떠난 그런 여행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남미를 경유하는 출장이 잡혔고, 일정 중간에 끼어있는 주말을 나는 지구 반대편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보낼 예정이었다.
마추픽추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고, 가족들도 없는데 혼자서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며 다녀오는 여행이 그다지 내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주말 동안 호텔에서 쉬기만 해도 너무 좋다고 소심하게 반항(?)을 해 보았지만, 현지 직원 분들은 "언제 또 남미에 와보겠느냐"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나를 떠밀다시피 했다.
마추픽추는 멀다. 수도 리마에서 쿠스코(Cusco)라는 도시까지 한 시간 가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쿠스코에서도 다시 차를 타고, 또 기차로 갈아타면서 세 시간이 넘게 더 가야 비로소 마추픽추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아구아스 깔리엔떼스(Aguas Calientes)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수많은 관광객들 틈에 끼어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비로소 마추픽추가 방문자들에게 그 모습을 허락한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낮 1시가 넘어 마추픽추에 도착했을 때, 나는 눈앞에 펼쳐진 잉카 유적의 거대한 존재감에 압도되었다. 가이드를 따라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 장엄한 광경을 눈에 담느라, 동시에 엄청난 크기의 돌을 날라 건설한 이 불가사의한 고대 도시의 비밀을 듣느라 바빴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돌담 곳곳에 그냥 편안하게 기대어 앉아 마추픽추의 전경을 여유롭게 눈에 담고 있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땀을 훔치며 마추픽추에서 내려오는 내내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다시 쿠스코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열차 시간까지 약간 여유가 있어 잠시 돌아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는 길게 이어진 계곡 양 옆으로 음식점과 상점들이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침 축구 중계가 한창이었는지, 마을 광장 한편에 있던 어느 펍에서는 배낭을 옆에 내려놓은 여행자들이 맥주잔을 손에 들고 소리를 높여가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다시 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문득 그들은 나와 다른, 어떤 여행을 하는 중일지 궁금했다.
그렇게 세 시간이 넘게 걸려 다시 쿠스코로 돌아와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체크인을 했을 때 밖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쿠스코 시내 관광을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데리러 오겠다는 가이드에게 나는 거짓말을 했다. 고산병 때문에 좀 힘들다고. 내일은 쉬고 싶으니 정오 무렵에 만나 같이 점심을 먹고 리마로 돌아갔으면 한다고. 가이드는 웃으며 코카잎 차를 마시면 효과가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혼자 숙소를 나섰다. 스페인의 통치를 받아 유럽풍의 건축물과 잉카 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이 작고 아름다운 도시의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도시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는 돌담 위로 기어올라가 이어폰을 꼽고 김동률의 “출발”을 들으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노란색 잉카 콜라 한 병을 사들고 광장 한편에 앉아서 무슨 행사인지 알 수 없는 전통 퍼레이드도 구경했다. 그렇게 진짜 여행 같은 몇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야 제각각이겠지만, 누군가 다시 나에게 하루 동안 마추픽추를 보고 오라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거절하겠다. 눈도장만 찍고 오기에 그곳은,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에는 자꾸만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게 잉카 문명을 알려준 사람좋은 중년의 가이드 덕분에 나는 그날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다음 기회가 허락된다면 그때는 가이드 대신 잉카 문명과 고대 도시에 관한 책을 한 권 사들고 갈 것이다. 그래서 나도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마추픽추를 눈에 담겠다. 내려오는 길에는 펍에서 모르는 이들과 맥주도 한 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