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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Jul 24. 2021

그 식당에는 접시가 없다

우리 가족이 사랑했던 미국 텍사스의 맛집들

10여 년 전, 처음 미국으로 출장을 갔을 때에는 출장비를 아끼고 아껴서 일정 마지막 날에 동료들과 스테이크를 먹었다. 고기의 부위, 굽기, 어울리는 와인 등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고, 스테이크가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멀리 출장을 왔으니 맛있는 것 하나 정도는 먹어줘야지 싶었다. 어쨌든, 어느 도시를 가도 유명한 스테이크 하우스 하나쯤은 있었으니까. 맛있고, 또 비싸고.


훗날 주재원 신분으로 미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 깨달은 것은, 내가 이곳에 출장차 방문한 것이 아니라 당분간 살러 왔다는 사실. 그리고, 유명 스테이크 하우스는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깨달음이었다. 실제로, 텍사스에서 지낸 4년 동안 우리 가족이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던 기억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데, 가격이 비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 가족이 사랑했던 음식은 따로 있었다.




우리 가족이 처음 바비큐 레스토랑에 갔을 때 나는 당황했고, 아이들은 환호했다. 당연히 누군가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그곳에는 널찍한 주문대 앞에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커다란 얼음 상자에 둥둥 떠있는 각종 탄산 음료를 직접 골라 병째로 들고 마실 생각에 신이 났고, 나는 메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파운드를 그램으로, 다시 근으로 환산하며 무엇을 얼마나 주문해야 할지 머릿속이 분주했다.


텍사스에는 크고 작은 바비큐 레스토랑이 아주 많다


차례가 되어 브리스킷(brisket), 립(rib)과 소시지를 적당히 섞어 주문을 하면 캐셔는 주문대 뒤에 놓인 훈제 화덕에서 고기를 바로 꺼내어 눈앞에서 썰어내고, 저울에 달아 가격을 매긴 뒤 두꺼운 기름 종이에 둘둘 말아서 내어준다. 참고로, 소고기의 양지 부위인 브리스킷을 주문할 때는 원하는 지방 함량에 따라 조금 더 촉촉한(moist) 또는 담백한(lean) 고기를 받을 수 있다.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 나는 언제나 "extra moist"를 주문했는데, 오랜 시간 천천히 잘 익혀진 이 고기는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그야말로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아 없어졌다.


우리 가족들이 특히 좋아했던 브리스킷 (extra moist)


내가 고기를 주문하고 계산하는 동안 아이들은 비어있는 테이블을 맡아놓고 엉덩이를 들썩인다. 와이프가 테이블마다 비치된 일회용 종이 식탁보를 널찍하게 깔고, 식당 한편에서 플라스틱 포크, 나이프와 종이 접시를 가져다 놓으면 식사 준비는 끝이다. 각자 고른 병 음료를 한 손에 들고 테이블 한가운데 쌓아놓은 고기를 맘껏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신이 나서 재잘대는 아이들을 굳이 조용히 시킬 필요도 없었다. 그곳은 다들 그렇게 웃고 떠들며 먹는 곳이었으니까.




4월이 되면 크로피쉬(crawfish)를 먹었다. 크로피쉬는 민물 가재인데, 4월에서 5월 사이가 제철이라고 했다. 본고장인 루이지애나와 가까운 텍사스에도 크로피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많이 있었는데, 주로 커다란 찜통에 넣고 각종 양념을 더해서 삶듯이 쪄내는 식이다. 그런데, 이 양념이 매콤 하면서도 살짝 우리나라의 라면 국물을 연상시키는 맛이라 맥주와 함께하면 더없이 궁합이 잘 맞았다.


이렇게 크로피쉬를 통째로 담아서 그대로 테이블에 가져다준다


크로피쉬를 먹으러 가면 포크와 나이프 대신 비닐장갑을 내어준다. 직접 크로피쉬의 껍질을 벗겨서 속살을 발라내어 먹어야 하기 때문인데, 요령을 배우면 아이들도 금방 따라할 수 있다. 인원 수에 맞게 적당히 파운드 단위로 주문을 하면 옥수수, 감자 등과 함께 삶아낸 뜨거운 크로피쉬를 커다란 비닐봉지 또는 양동이에 통째로 담아서 가져다준다. 이 자유분방한 테이블 매너에 아이들은 또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우리 부부는 난장판으로 끝날 것 같은 축제를 예감하는 비장한 기분으로 아이들 손에 비닐장갑을 두 겹씩 끼워주곤 했다.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난다. 묵직한 접시는 커녕 포크와 나이프조차 없었던 바비큐 레스토랑의 투박한 야외 테이블과 마치 캠핑장에   살짝 들떠 북적거리던 그곳의 공기와 소음. 육즙 가득 부드러운 브리스킷에서 느껴지던 훈연의 향과,  벗겨낸 크로피쉬의 껍질에 입을 대고  빨아대면 입안 가득 퍼지던 살짝 비릿한  고소한 내장의 . 그리고, 크로피쉬 양념이 눈에 들어가 따갑다고 비닐장갑   손을 파닥거리며 연신  엄마를 불러대던  아이의 찡그린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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