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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Aug 22. 2021

샌안토니오와 청계천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의 가치

내가 있던 휴스턴(Houston)은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도시 자체는 다소 "심심"한 편이다. 다른 도시들처럼 꼭 구경해야 할 소위 "랜드마크"가 별로 없어서, 지인들이 방문하면 고민 끝에 추천하는 곳들이 NASA 우주센터, Rice 대학교, 갈베스턴(Galveston) 해변 정도다. (그나마도 NASA 우주센터와 갈베스턴은 휴스턴에서 차로 한 시간 이상 가야하기 때문에, 직접 구경시켜줄 각오가 아니라면 섣불리 추천하기 어려움)


대신 휴스턴과 많이 멀지 않은 곳에 나름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은 도시들이 있는데, 바로 오스틴(Austin)과 샌안토니오(San Antonio)다. 이 두 도시는 휴스턴에서 차로 두 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데, 우리 가족도 특별한 계획 없는 주말이나 연휴 시즌이 되면 종종 당일 치기 또는 1박 일정으로 놀러 가곤 했다.




샌안토니오는 휴스턴에 이어 텍사스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도시다. 과거 텍사스 독립 전쟁 당시 치열했던 알라모(Alamo) 전투의 유적지가 남아있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해양 생태 공원인 씨월드(Sea World)도 유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바로 리버워크(River Walk)였는데, 도심 한복판을 관통하는 이 수로가 서울 청계천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샌안토니오 리버워크의 전경


도심에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 처음 리버워크에 들어서던 순간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울창한 나무 숲에 감싸인 듯한 수로와 그 양 옆으로 맞닿을 듯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던 오래된 건물들, 수로변 산책로의 노천카페와 물길을 따라 오가는 작은 유람선까지. 현대적으로 잘 "조성된" 청계천 같은 이미지를 상상했던 나는 마치 테마 파크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잠시 넋을 놓았다.


리버워크는 1920년대에 대홍수를 겪은 이후 샌안토니오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텁고 울창한 나무들, 수로변 오래된 건물의 낡은 외벽과 페인트 칠 벗겨진 테라스 난간, 손때 묻어 맨질맨질해진 산책로의 돌담까지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여기는 원래부터 내 자리다"라는 듯한 아우라를 풍기며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리버워크의 크리스마스 장식


리버워크에는 물 내음과 사람 내음이 공존한다. 나무 그늘 드리운 산책로를 걷다 보면 한적한 노천카페를 만나고, 조금 더 걷다 보면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함성과도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산책로 한편에는 각종 수공예품을 늘어놓고 파는 플리 마켓이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고, 물길을 오가는 유람선이 만들어낸 잔물결 위로는 오리들이 둥둥 떠다닌다. 묘하게 조화로우면서도 참 근사하다.




작은 유람선을 타는 사람들과 수로변 산책길을 걷는 사람들이 서로를 구경(?)하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어째서 이곳은 이렇게 근사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같이 빠른 세상에 이런 도심 커널 웨이 하나쯤 몇 년 안에 뚝딱 만들어 내겠지만, 아마 절대로 이곳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시간"이 만들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서 이제는 닳고 때묻어 둥글어진 수로변 경계석의 모서리가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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