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방인 Aug 12. 2021

일이 재밌으면 돈 내고 다녀라

회사에서 보내는 하루도 소중한 내 삶의 일부

내가 신입사원이었을 때, 우리 부서의 담당 임원이셨던 상무님은 일에 대한 열정도 넘치셨지만 성격도 급하셔서 중간급 간부들과 미팅을 할 때면 회의실 바깥으로 늘 고성이 새어 나왔다. 그럴 때면 세상 물정 모르던 나와 동기들은 얼어붙은 사무실의 공기와 선배들의 눈치를 살피며 한껏 자세를 낮추고 가슴을 졸여야 했고.


하지만, 그런 상무님도 나를 포함한 신입사원들을 마주칠 때 만큼은 표정이 누그러지셨다. 아직 선배들에게 배워가며 잡다한 일이나 처리하던 우리가 상무님을 마주칠 기회도 많지 않았지만, 가끔 지나는 길에 마주쳐 꾸벅 인사를 드리면 반가운 얼굴로 어깨를 두드리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으신다. "요즘 일은 재미있나?"


선배들 눈치 살피랴, 매일 사고 치고 수습하랴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고 있던 나는 속으로 "제발 다시 학교로 보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직장인 패치가 잘 작동하고 있던 나는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네! 재밌습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고, 맘에 드는 답변을 들으신 상무님은 기다렸다는 듯 "재밌으면 돈 내고 다녀야지?"하고 웃으며 다시 가던 길을 가셨다.




좋은 직장이었다. 공대를 졸업한 내가 현장에서 배울 것도 많았고, 나름 창의성을 발휘해가며 성과를 낼 수 있는 설계 부서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부러워했던 대기업. 그런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입사 5년 차가 되어 한창 바쁘게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실제로 나는 2년 뒤에 사직서를 쓰고 회사를 떠났다.)


대리로 승진도 했고, 일도 손에 익어 제법 잘한다는 칭찬도 들었다. 엄청 즐겁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이대로 다닐만하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사무실 선배, 동기들과 함께 늦은 저녁 겸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화기애애하던 가운데, 나보다 3년 선배이던 형이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야, 가끔 좀 빡세긴 해도 여기 일 하나는 진짜 재밌지 않냐?"


술이 확 깼다. 가슴 한편에 돌덩이가 얹힌 것 마냥 묵직해지면서, 건성으로 대답하고 억지로 웃었다. 그 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 잘하기로도 유명하고, 윗분들 평판도 좋아서 벌써 몇 개의 프로젝트를 리딩 하는, 그야말로 "유망주"였다. 형은 일이 뭐 그렇게 재미있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계속 여기서 일해도 괜찮은 걸까?"




그 후로 10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지만, 아직도 나는 어떻게 하면 일이 재미있어지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가끔은 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을 하다가 끼니를 놓치고, 늦은 밤 사무실을 나서다가 갑작스레 떠오른 아이디어 때문에 다시 컴퓨터를 켜기도 했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일에 몰입하는 순간, 같은 사무실에서도 시간의 밀도는 달라졌고, 늘 나를 괴롭히던 그 질문도 이 순간만큼은 나를 조금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지금, 나는 아주 가끔 일이 재미있고,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래도, 조금 더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하거나, 내 앞에 주어진 일에서 재미를 찾기 위해 매일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첫 직장에서 내게 일의 재미 운운하던 그 선배나 상사처럼 성공한 직장인이 될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일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거기에 몰입하는 순간, 매일 출근길마다 노비의 삶이라고 푸념하던 나의 하루, 그 시간도 다시 “내 삶”으로 바뀐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운이 좋거나, 아니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