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긴 맛
어제 조금 늦은 시간에 귀가해서 씻고 나와보니, 와이프가 거실에서 공포 영화를 보고 있다. 나는 공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주말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기 싫어서 와이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휴대폰도 만지작 거리고 멍멍이와 장난도 치느라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거실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보지 마... 들여다보지 말란 말이야..."
무슨 소리인가 하고 돌아보니,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 녀석이 어느새 방에서 나와 거실 한편에서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TV 화면을 응시하면서 중얼거리고 있다. 화면 속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발을 잡아끄는 느낌에 놀라 잠에서 깬 주인공의 시선이 천천히 침대 아래로 향하는 중이었고, 아들 녀석은 사력을 다해 주인공을 말리고 있었다. 침대 밑을 들여다보면 꼭 무서운 장면이 나온다고. 이래서 바닥에 공간 있는 침대는 안된다며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인다. (지금 녀석이 쓰는 침대는 서랍 일체형이라 바닥에 공간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녀석은 그랬다. 거실에서 혼자 마리오 카트 게임을 하면서 급커브 구간에서 자동차 핸들 모양 조이스틱을 있는 힘껏 돌리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인가는 밖에서 놀다가 어디선가 죽은 새를 주웠는지 집에 가지고 들어와 "엄마 이거 봐요"해서 와이프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남매가 너무 심하게 다툰다 싶어 무섭게 꾸짖은 날, 눈이 벌게지도록 혼이 난 녀석들을 그만 놓아주면서 "얼른 가서 이빨 닦고 자!" 했더니, 아들놈은 그 와중에도 "이빨은 동물한테 쓰는 말이고, 사람한테는 이라고 해야 하는데요" 했다. 드디어 살았다며 꽁지가 빠지게 욕실로 달아나던 5살 딸아이도 아마 속으로 제 오빠 녀석이 제정신인가 했으리라.
세상 모든 아빠들이 다 그런 것일까? 나는 아들이 나를 닮았으면, 또 한편으로는 나를 닮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나를 닮았으되 나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으로 커주길 바라는 마음은 종종 아이의 작은 행동을 꾸짖거나 때로는 아이를 통제하는 식이 되었고, 나는 늘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역시나 아이는 내 맘대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순하고 착한 성격에 아빠에게 대든 적 한 번 없는 녀석이지만, 결국 "아빠의 제압"을 교묘히 피해 제 개성대로 한해 한해 성장해 왔다. 다행스럽게도.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에 약간 겁이 많고,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춘기 아이들만 둘 있는 집같지 않게 대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클수록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 녀석은 틈만 나면 방에서 기어 나온다. 그리곤 슬그머니 책을 읽는, 설거지를 하는, 빨래를 개는 엄마 옆으로 다가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어댄다. 곧 중2를 눈앞에 둔 무서운(?) 여동생 방에도 겁 없이 기웃거린다. 실없는 농담 끝에 동생에게 등짝을 한 방씩 맞곤 하지만 동생 놀리기도 녀석의 중요한 일과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가 바랬던, "나를 닮았지만, 나보다 훨씬 멋진" 청년의 모습과는 살짝(?) 다르긴 하지만, 이제 나보다 덩치가 더 커져버린 저 아이를 관찰하는 일이 제법 즐겁다. 그런가 보다. 아이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키우기"에서 "바라보기"로 바뀌니 비로소 더욱 사랑스럽다. 아들 녀석이 저렇게 자라지 않았다면, 과묵한 아빠와 까칠한 사춘기 딸아이 사이에서 와이프는 얼마나 심심했을까? 생각하니 또 고맙다. 상으로 조만간 바닥에 공간 “있는” 침대로 바꿔주든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