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아줌마들을 보내셨나?
퇴근길 지하철 환승역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는데, 정차 중인 지하철 객실 안에서 "학생! 학새앵~!" 하는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아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고 막 지하철에서 내린 남학생을 불러 세우려 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 학생은 아주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아주머니는 열차 출입문이 닫힐 때까지 학생을 부르며 휴대폰을 들고 흔들었다. 뒤늦게 휴대폰이 사라진 것을 알아챈 학생이 황급히 닫혀버린 열차 출입문을 향해 돌아섰지만 이미 열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열차 창 너머에서 아주머니는 연신 손가락으로 다음 정거장 방향과 휴대폰을 번갈아 가리켰다. 아마도 다음 정거장에서 기다릴테니 와서 찾아가라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리라.
워낙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마치 내가 잃어버린 휴대폰을 돌려받은 것처럼 고마움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학생은 다음 정거장에서 무사히 휴대폰을 찾았을 것이다. 다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또 한 명의 "아줌마"가 떠올랐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어느 날, 작은 아이 학교 행사 때문에 와이프는 외출하고 나와 큰 아이 둘이서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우리는 햄버거를 먹기로 하고 집 근처의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평소보다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매장에 손님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정도 더 기다리고 있었을까, 옆 테이블에 앉아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기, 우리보다 먼저 온 것 같은데 아직 음식을 못 받고 계신 것 같아서요. 매니저한테 설명을 요구 하시든지 아니면 음식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항의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 이야기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고맙지만 조금 더 기다려보겠노라고 그저 좋게 넘어가려고 했고, 그 아주머니는 식사를 하면서도 우리 테이블에 음식이 나오는지 계속 지켜보다가 결국 직접 매니저를 불러서 항의했다. 그것도 아주 무섭게. 매니저는 직원들이 주문을 놓친 것 같다며 사과했고, 결국 음식값을 환불해 주었다. (물론, 우리가 주문한 햄버거에 디저트로 애플파이까지 공짜로 가져다 주었고)
사실, 이 아주머니가 나를 대신해 햄버거 가게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그저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사람이 둘 있었으니, 바로 나와 그 아주머니 남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나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를 망설였고, 그 아주머니 남편은 아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민자(인 줄 알았겠지)를 도와 매니저를 꾸짖는 동안에 마치 햄버거가 너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귀찮은 일은 일단 피하고 보는 이 중년의 겁쟁이 아저씨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요즘 사람들은 오지랖을 싫어한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남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참견하거나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매너가 아니라고들 한다. 주재원 생활 막바지 무렵에 가족들을 먼저 한국으로 보내고 혼자 생활하던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당신, 옷을 거꾸로 입은 것 같아요." 혼자 지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싶은 생각에 서러움이 밀려오면서, 속으로 남이사 옷을 거꾸로 입든 말든 하며 투덜거렸다. 그 덕에 하루 종일 옷을 거꾸로 입고 돌아다니는 참사를 면할 수 있었음은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햄버거 가게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을 돕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그 아주머니를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바로 그 아주머니의 아이들과 내 큰 아이다.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아줌마"가 씩씩하게 작은 정의를 구현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목격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용감하고 오지랖 넓은 착한 아줌마들이 세상을 조금씩 좋은 곳으로 바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점잖고 수줍음 많고 덩치 큰 아저씨들을 대신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