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기사님, 제 치킨은 좀 천천히 가져다주셔도 됩니다
미국에서 차를 사서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차가 흔들리는 느낌이 났다. 뒤차가 차선을 바꿔 우회전을 하려다가 내 차 범퍼를 살짝 긁은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사고인지 확인하기 위해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리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사고를 낸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싶더니 이내 차를 몰고 달아나 버렸다. 황급히 차를 타고 뒤쫓아 가려다가 "사고 내고 도망치는 차는 절대 따라가서 잡으려 하면 안 된다"는 지인들의 조언이 생각나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차 사고가 났을 때 현장에서 도망치는 운전자들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불법체류자이거나, 미보험 차량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범죄 수배 중이거나. 이중 어떤 경우가 되었든 이런 류의 사람들은 시비가 붙어 경찰을 만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못할 짓이 없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총 맞을 수도 있다는 뜻) 그러니, 누군가 사고를 내고 도망치면 그냥 운이 나빴다 생각하고 그대로 도망치도록 두어야 한다. 그들은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도로에서 소위 "잃을 것 없는 사람”처럼 운전하는 이들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4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배달의 천국이 되어 있었다. 배달 주문이 많은 점심 시간, 저녁 시간이 되면 도로는 배달 오토바이로 넘쳐난다. 그런데, 이분들이 정시에 (혹은 그보다 빠르게)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 감수하는 위험의 수준이 정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배달 오토바이들이 하나같이 비상등을 깜빡이며 달린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배달 기사들을 욕하다가, 마치 목숨을 내놓은 것처럼 질주할 수밖에 없는, 그분들이 처한 상황(계약 구조, 평가 방식, 페널티 등)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이른바 잘 나간다는 배달 플랫폼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사거리 정지 신호에 거침없이 진입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며 비상등을 켜고 달리는 저 오토바이의 배달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물건이, 부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길 바라지만... 진짜 위급한 것은 그 배달 가방 안의 치킨이 아니라, 배달 기사들과 보행자들의 안전이 아닐까?
예전에는 동네 중국집에 주문 전화를 하고 기다리면... 안 왔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걸어 음식 언제 오냐고 재촉하면, 사장님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과장된 목소리로 “아이고, 지금 막 출발했어요!"라는 식상한 멘트를 날리곤 했다. 나는 알면서도 속고, 사장님은 내가 안 속는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진부한 두뇌 싸움이다. 그렇게 약속 시간을 넘겨 배달된 짜장면과 탕수육에는 늘 군만두 서비스가 있었다. 이 집은 제 때 배달하는 법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늘 그곳의 짜장면만 먹었다. 맛있었으니까.
난 차라리 그때가 더 나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