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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May 02. 2021

내가 벼락 거지라고?

우리 사회는 행복의 커트라인이 너무 높다

4년 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이제 반년이 다 되어간다. 하필 코로나로 온 세상이 어수선한 시기라서 친구들과 제대로 된 귀국 인사도 나누지 못했지만, 우리 가족들은 서서히 한국에서의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주위에서는 아이들이 다시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들 걱정했지만, 웬걸. 한국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나다.




한국에 돌아와 오랜만에 다시 본사로 출근을 하면서 한동안 못 만났던 동료들에게 복귀 신고도 하고, 새롭게 입사한 분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미국에서 고생이 많았겠다, 자가격리 기간 중에 얼마나 답답했겠나 등등 귀국 후 근황을 주고받다 보면 대화 주제는 거의 대부분 "그래서 지금 어디 살아? 미국 나갈 때 한국 집은 어떻게 했어?" 하는 질문들과 함께 부동산으로 이어졌다.


그다지 영악하지 못했던(?) 나의 부동산 이야기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던 이들이 들려준 "아는 사람"의 성공담을 묵묵히 듣고 있자니, 어느새 대화는 주식으로 옮겨간다. 이번에는 작년에 미국에서 주식에 돈 좀 넣었는지, 재미는 좀 봤는지 묻는다. 작년에는 이래저래 일이 바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주식에 투자할 여윳돈도 없었노라고 털어놓자 나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에서 또 한 번 진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모처럼 날씨도 화창하고 미세먼지도 없던 주말, 우리 집 개 하루 산책을 핑계 삼아 와이프와 함께 인근의 한적한 공원으로 나섰다. 공원 곳곳에는 우리처럼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서너 명씩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주말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줄 알았다. 노천 테이블에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그분들 옆을 지나쳐 가면서 의도치 않게 대화의 일부를 엿듣게 되기 전까지는.


"... 억 원이 올랐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 빨리 그 집을 팔고 ○단지로 옮겨가야 한다고..."


탁 트인 공원을 배경으로 눈부신 햇살 속에서 마냥 평화로워 보였던 그 자리에서의 대화 주제가 그렇게 다급하고 심각한(?) 것일 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우리 부부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서둘러 그 대화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한동안 걷던 와이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잘못 살았나?" 한국으로 돌아와 지난 몇 달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스마트폰을 열면 주식으로 큰 돈을 벌어 고단한 인생에서 비로소 탈출한 누군가의 성공담이 넘쳐난다. 괴담이나 전설 수준이 아니라, 무려 기자라는 양반들이 들려주는 공신력 있어 보이는 이야기다. TV에서는 대놓고 주식 투자를 가르쳐주는 "예능" 프로그램이 생겼고, 연예인들도 본인의 재테크 성공담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편향된 사례와 과장된 숫자들이 각종 매체에 쏟아져 나오면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거지"로 여기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정당하게 노동을 해서 돈을 벌고, 저축을 해서 노후를 준비하는 삶이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근로 소득 따위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다들 서둘러 한몫 잡아서 이 지옥 같은 삶에서 탈출해야 한단다. 총자산이 10억 원이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10%에 해당한다고 하던데, 요즘같은 시대에 과연 나는 상위 몇 % 정도의 자산을 가지면 스스로를 “거지”라 여기지 않아도 될까?


백 번 양보해서 자녀들에게 자산 소득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일이 학교 공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치자. 그러면 나도 아이에게 파이어족이 되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고작 10% 밖에 안되는 사회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일은, 당장 내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0%도 안된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미국에서 운전을 하다보면 교차로에서 구걸을 하는 “진짜 거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느 날, 신호 대기 중이던 낡은 픽업 트럭의 유리창 사이로 내민 운전자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1달러짜리 지폐가 아닌 햄버거였다. 한눈에 봐도 절대 부자로는 보이지 않았던 그는, 아마도 진짜 거지가 겪는 가난이 어떤 고통인지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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