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방인 Mar 20. 2022

나의 학교, 내 아이의 학교

더디지만 세상이 좋은 곳으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큰 아이가 토요일인데도 아침부터 분주하더니 학교에 간다고 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수강하는 학점제 수업을 듣는 첫날이라면서 집을 나섰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이가 제 엄마 곁에서 수다 떠는 소리를 살짝 엿들었다. 교실 뒤에 웬 어른 한 분이 서 계셨는데, 수업 시작 전에 앞으로 나와서 "아마 저를 처음 보는 분도 있을테니 잠깐 인사를 드릴게요. 혹시 저를 모르시는 분?" 하길래 손을 번쩍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분이 그러시더란다. "저는 이 학교 교감입니다."


일 년을 넘게 다닌 제 학교 교감선생님의 얼굴을 모르는 아들 녀석의 무신경함도 요즘 시대에는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깔깔대는 와이프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던 1990년대에, 나도 우리 학교 교장, 교감선생님의 얼굴을 모르고 살 수 있었을까?

 



당시 학교에는 소위 "권위"라는 것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일렬로 줄 맞춰 서서 아침 조회라는 행사를 치러야 했다. "교장선생님께 대하여 경례!"라는 구령에 맞춰 단상 위의 교장선생님께 우렁찬 목소리로 거수경례를 했고, 결코 짧지 않은 훈화 말씀이 이어지는 동안 트레이닝복 차림의 체육선생님들은 “사랑의 매”를 들고 대열 사이를 누볐다. 그때 나는, 단상 옆에 서 계시던 담임 선생님이 애써 우리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는다고 느꼈다.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로만 가득했던 학교. 공부 열심히 하는 착실한 모범생 이외의 선택지는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때, 소위 "겁 많은" 학생이었던 나는 어떤 선생님을 만났다. 교편을 잡고 처음 부임한 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 담임으로 우리와 만난 그 선생님은, 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의 존 키팅을 연상시키는 분이었다. 매 학기 성적으로 반이 바뀌던 소위 "수준별 이동식" 수업을 자랑하던 비평준화 학교. 선생님은 그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당당하기를, 무엇보다 권위라는 괴물에 주눅 들지 않기를 바랐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출처 https://movie.daum.net)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은 어느 아침 조례 시간에는 "자식들아, 어깨 좀 펴라!" 하시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목청껏 불러주셨고, 교련복을 입고 떠난 1박 2일의 수련회에서는 남몰래 우리 반 아이들의 텐트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작은 종이컵에 쓰디쓴 술을 아주 조금씩 따라 주셨다. 복도를 지나다 마주친 선생님은 항상 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친근한 동네 형처럼 걷고 있었고, 그 누군가는 주로 학교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모범생이 아닌 선택지를 손에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이었다.




누구보다 선생님을 동경했고, 존경했지만 여전히 나는 겁 많고 착실한 모범생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도 오래도록 그렇게 안전하게 사는 방식을 택했다. 우연히 학교 복도를 지나다가 교무실 창문 너머로 목격한, 교감선생님이 내 담임선생님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분노와 무력감이 뒤섞인 복잡한 것이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 한 번도 선생님을 찾지 못한 것은 어쩌면, 선생님이 우리에게 바랬던 것과는 거리가 먼 어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부끄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가 아이들을 키우고, 이윽고 그 아이들이 다시 학교에 가는 나이가 되었다. 사실, 아이들이 처음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다. 학교라는 낯선 공간을 처음 접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이후로도 아이들에게서 학교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더 이상 정체불명의 권위에 주눅 들거나 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느꼈다. 비록 나는 선생님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어른이 되었지만,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 내 아이들의 학교는 그때 나의 학교보다 좋은 곳으로 변해 있었다. 나의 선생님, 나의 캡틴은 결코 틀리지도, 실패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