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을 원하지 않는 시대
한 해가 저물어가던 11월의 어느 저녁 무렵, 팀장으로 첫 해를 보낸 나는 담당 임원과의 정기 면담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팀장을 내려놓고 다시 팀원으로 돌아가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년 간, 실무조차 생소한 팀의 리더 역할을 맡으면서 일 관리, 사람 관리로 마음고생을 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스트레스를 핑계로 퇴근 후 가족들에게 짜증을 부렸던 기억까지 떠오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진심으로 팀장에서 “잘리고” 싶었다.
한 편, 그해 내가 맡은 팀에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선배 팀원들도 있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내 바로 옆 팀의 팀장이기도 했던 분들이었다. 내가 팀장이라는 역할을 버거워하며 마음고생을 하던 그때, 팀장 보직을 내려놓고 다시 팀원으로 일하던 그분들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실제로 나의 팀원이었던 한 선배는, 직책에서 잘렸다는 자괴감은 잠시, 오로지 일에만 집중하면서 지낼 수 있는 지금이 “팀장이던 그때”보다 훨씬 즐겁다고 했다.
팀장이 된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의미 있던 시절이 있었다. 실무 역량을 인정받아 이제는 관리자가 된다는 것, 더 나아가 임원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도달했다는 것. 그래서, 팀장이 된 사람들은 축하받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정식 인사 발령이 나기 전, 팀장 승진 예정 소식을 넌지시 알려주던 담당 임원도 그저 내게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만 이야기했고, 나는 그것이 승진을 의미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뒤 그가 말한 그 “좋은 일”은 정기 인사 발표를 통해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팀원에서 팀장으로 신분이 바뀐 나는, 매 순간 팀원들이 하는 일에 대해 의사 결정을 내려야 했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했다. 내가 직접 하지 않은 일들을 꼼꼼히 알아야 했고, 유관 부서에서는 조직도를 보고 우리 팀을 찾아내 책임자인 내게 연락했다. 정작 내가 일을 할 시간은 없었다. 아니, 회사는 더 이상 내게 실무를 통해 성과를 내는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관리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는 몰랐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수당, 그리고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잠시 동안의 뿌듯함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 또 포기해야 하는 많은 것들을 전혀 보상해주지 못했다. 회사가 팀장에게 바라는 것은 팀원들이 일하게 하는 것, 회사가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해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내게 던져진 온갖 불합리한 상황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팀원들에게까지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매일 다짐했다. 팀장 노릇 중 가장 힘든 부분이자,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내 기대와 달리, 그 면담 이후로도 나는 팀장에서 “잘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 역시 회사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했으니, 아마도 회사는 나에 대한 판단을 이미 끝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12월의 마지막 며칠 동안, 나는 몇몇 팀원들이 보내준 송년 인사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저 인사치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짧은 문장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 잘 몰랐지만, 그래도 약간의 안도감과 위로감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