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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May 20. 2023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

프롤로그

내 서재는 대문 바로 옆에 있는 방이라 남편이 공을 많이 들였다. 14피트(약 4미터) 높이의 천장 아래 바닥에 오크 마루를 깔았고, 벽 하나를 가득 매운 창은 앞 뜰의 식물들을 내다보고 있으며, 그 옆의 벽 면에는 그림을 세 개나 걸었다. 이 아름다운 서재 한가운데는 나만을 위한 단단하고 넓고 아름다운 오크 나무 책상이 있다. 이 과분하게 아름답고 유용한 서재에 앉아있으며 나는 이 방을 다른 용도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아마 쓸모없는 과분한 공간이 될 테니. 지난 일 년 간 나는 여기서 내 이름 석자가 제일 앞에 들어간 논문을 한 편도 써내지 못했다. 이 공간은 뉴욕타임스나 디 애틀랜틱 매거진이나 읽고 있기엔 지나치게 훌륭하다.


과분하게 멋들어진 서재에 앉아서 컴퓨터 전원을 켠다. 논문을 쓰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남편 월급의 반도 채 되지 않는 연봉에, 매년 고용을 갱신해야 하는 6년 차 계약직 연구원이지만 그래도 대학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으니. 6년 차. 처음 미국에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왔을 때 나는 졸업을 하자마자 이 광활한 미국 땅 어딘가에서 나를 원하는 곳을 찾아 자유롭게 날아가 연구중심대학의 조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꿈꿨다. 대학원에서 연구조교로 1400불 남짓한 월급을 받으며 이런 자유로운 꿈을 꾸고 있을 때 남편을 만났다.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던 남편이 자신이 꿈꾸던 회사로부터 합격 연락을 받았을 때, 그리고 첫 해 연봉이 10만 불이 넘을 것이라고 들었을 때 우린 칙필레 패스트푸드 점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손가락 끝까지 뻗어오는 기쁨을 느끼면서도 그때 나는 나를 불러줄 어느 대학의 교수직을 찾아 미국 땅 어디로든 날아가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을 직감했다. 이 작은 도시엔 그의 꿈의 직장이 있고, 돈이 있고, 집이 있고,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삶이 있다. 꿈은 이 모든 걸 버릴 만큼 대단하지 않다.



내 모니터에 붙어 있는, 한 영화 평론가의 블로그에 적힌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는 구절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이 구절을 매일 곱씹어 읽지 않으면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더 이상 인생을, 먼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 교수가 되는 건 힘들다. 기회가 너무 적다. 공고가 난 모든 대학에 지원을 해야 겨우 한 군데 임용제안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이 작은 도시에서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은 단 하나뿐이다. 나는 아마도 교수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조용히 생각한다.


이제 막 3개월이 넘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처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일 관두고 집에서 아기 볼까. 몇 년간 아이를 보느라 직장을 그만두어도 나는 별로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기를 돌보고, 집을 돌보고, 매일 장을 보고, 매일 요리를 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이 불안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는 계약직 연구원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남편은 내가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아이를 이유로 꿈을 포기하려는 것을 차마 내버려 두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옴짤달싹 할 수 없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닌 지도 벌써 여섯 달이나 지나간다. 어린이집에 가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에 남편과 일본라멘집에 가서 아주 늦은 점심 겸 아주 이른 저녁을 먹는다. 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때 나는 조용히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상의 작은 행복에 눈을 돌린다. 정갈하지만 이 작은 도시의 히피 감수성이 묻어나도록 디자인된 라멘집의 나무 식탁, 나무 의자, 나무 천장, 나무젓가락, 내 앞에 앉은 다정한 남편, 야채가 듬뿍 올라간 채식 라면, 라멘을 먹으면서 남편과 하는 이야기 이 모두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한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면 쇠고기, 감자, 브로콜리로 아이 저녁을 만들어 먹이고 함께 놀다 재워야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곤 낮에 잠깐 읽던 책을 마저 읽다 샤워를 하고 자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런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저녁이 있는 삶. 책을 읽는 지적인 여유가 있는 삶. 금요일 오후 4시라는 애매한 시간에 함께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과 라멘집에 가서 천천히 음식과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 휑했던 2층 아이 방 벽에 벽 선반을 달고 그 선반에 아이가 나중에 자라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두고 기뻐할 수 있는 삶. 소소하게 내 일상에 대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내가 듣고 보고 배운 것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낭비하는 시간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 삶. 저녁에 순전히 개인적인 흥미에서 나온 탐욕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삶. 이런 삶은 조교수가 되면 불가능하다. 테뉴어를 받기 위해 매일 논문을 쥐어 짜내야  것이다. 지금  삶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삶이 내가 사랑하는 삶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어린이집 선생님께 받아 안아 올리니 내게 큰 웃음을 짓는다. 사랑스럽다. 아이가 있어 힘들지만 아이가 있어 다행이다. 아이가 태어난 작년에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나는 불안에 허덕이며 내 이름을 제일 앞에 둔 논문을 한 편도 써내지 못했다. 그래도 그동안 나를 닮은 아이를 9개월이나 키웠다. 내가 불안에 잠식되어 갈 때도 아이는 나를 찾고, 나는 아이를 안아 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만큼 아이는 자란다. 너무 작게 태어났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아이는 이제 평균 체중의 아이가 되어 혼자 앉아서 놀면서 다양한 소리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지난 9개월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내가 썼던 어떤 논문보다 대단한 걸 키워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아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연구를 하지 못해도, 논문을 쓰지 못해도, 대학에서 가르치지 못해도, 이런 삶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아마도 이런 삶을 살 것이고, 이런 삶에 만족하고, 이런 삶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안고 어린이집 주차장으로 걸어 나온다.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우고 조수석에 앉는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차 안에서 휴대전화가 울린다. 남편은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다. 휴대전화를 찾아 집어든다. 몇 달 전 내가 지원했던 대학의 심사위원이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차 창밖의 햇살의 따뜻함을 만끽한. 이 작은 도시의 나무들은 드디어 푸른 잎을 피워내고 있다. 이제 곧 찌는 듯한 더위가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몇 주의 시간이 있다. 덥지 않고 따뜻한, 눈부시지 않고 밝은 봄의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 남편과 더 자주 시간을 내 금요일 아이를 픽업하기 전에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Hello? 그리고 듣는다. 를 조교수 임용대상자로 고려 중이고 만일 임용제안을 받는다면 수락을 할 것인지 묻는다. 한때 간절히 원했던 삶에 대한 동경 버리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을 사랑하기로 한 그즈음 교수 임용 제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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