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즉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메리 키노 Mar 24. 2024

신세계

철 없는 나와의 마찰

지난해 인터넷을 설치하려고 모기업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였다. 결과적으론 인터넷과 티브이 계약을 하게 되었지만 그 상담사의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와 꼼꼼하게 챙겨주는 듯한 마음이 느껴졌던 것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아내와 입을 모아 이야기했던 게 목소리가 뷰티유튜버 레오제이를 닮아있다고 한동안 레오제이의 유튜브를 시청하기도 했다)


구직활동을 하다가 채용사이트에 포지션 제안이 들어왔다. 열어보니 상담사 업무. 정규직에 복지도 좋아 보였다. 목소리 하나만큼은 내가 가진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해 왔기에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반 설렘반으로 포지션 제안 수락을 눌렀다. 위의 그 상담사처럼 나도 그런 기억에 남는 상담사가 되고 싶다는 이상에 젖어들었던 것 같다.


면접장엔 생각보다 인원이 많았다. MZ젊은이들 틈에서 잘할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더 이상 그들과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나답게 면접을 보자고 정하고 면접장으로 뛰어들었다. 병원에서 일한 이력이 많아 걱정하는 면접관의 노파심을 떨쳐내기엔 부족했지만 이젠 목소리로 일해보고 싶다는 나의 열망을 나름대로 표현하고 나왔다.

고민해 보겠다는 말을 들으며 시원하지도 막막하지도 않은 중간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느낌을 받으며 면접장을 나왔다.

오후 6시, 안내하는 날짜에 출근하라고 문자가 왔다. 그제야 제대로 볼일 보고 나온 느낌. 보쌈, 족발에 축하반주를 했다.


그러고 15일 만에 제 발로 나왔다.

나를 알아가는, 스스로 반성하는 인고의 시간을 겪고 나왔다. 제목 그대로 '신세계'.

처음엔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도파민의 분비는 줄어들었다.

누가 상담업무를 꿀보직이라고 했는가.


교육일정을 진행할수록 상담업무에 필요한 내용들의 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갔다. 분명 따라가는 동기들도 있었는데 나 혼자만 어떤 장벽을 넘지 못하는 느낌이 들자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특히 실전업무에선 여태 공부했던 내용이 증발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매번 불확실성과 싸워야 했다. 누군가 옆에 있지 않으면 제대로 안내를 할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자신 있다고 생각한 목소리도 실전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개미처럼 작아지고 갈길을 잃고 방황하는 말이 서툰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번 한 번이 응급상황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바르고 신속한 안내, 고객을 설득하는 유연함과 방탄멘털이 필요했지만 어느 순간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그럴 수 없는 그 순간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이제 교육받고 있고 배워가는 과정인데도 잘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일단 못나보였던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짙은 안갯속,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 속, 더 이상 발을 빼지 못하는 늪지대에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느낄 일인가 싶었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은 좋지만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없는 시기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왜 그리 어려울까?'

실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나왔지만, 그 짧으면서도 길었던 시간에 두 가지를 정립했다.

첫 번 째는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들었고, 두 번 째는 나는 어려움 속에서 더 내면을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처음이 당연히 어려운 거지만 오히려 20대 시절보다도 더 조급하고 마음이 작아졌던 것 같다. 한 직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의 여부가 여전히 감정에 의해서 결정하게 되는 부분이 남아있다.

평소와 똑같은 결정을 하게 되는 때가 오면
반대로 결정을 해보도록 노력해 보세요


교육을 받으며 중간에 심리상담을 받을 수 기회가 주어져 받았던 전문가의 피드백이었다. 반대의 결정은 나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행동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나는 소극적인 액션을 취하고 있었다. 분명 반대로 하려는 그 행동에 고민이 많아지고 내면적으로도 수없이 마찰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동기들과 말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쉼 없이 고민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 행동이 즉시 나오지 않는다. 연습이 필요하고 수백, 수천번 마주해야 할 마찰이지만 그 마찰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다음 직장에선 나와 마찰을 끊임없이 할 생각이다. 어떻게 바뀌는지, 어떤 '신세계'와 마주할지 기록으로 남겨서 되풀이하는 횟수를 줄이자.


제 발로 나온 날, 다른 곳으로 입사지원.

다음날 면접, 그리고 입사확정.



매거진의 이전글 언어의 돌파구 같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