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연필
Q1. 연필로 쓴 글의 어떤 점을 가장 음미하시나요?
A. 저는 완성의 맛을 음미하는 것 같아요. 인생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하지만 단어와 문장은 내 나름대로 완벽하게 맺음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아요. 사실 시도하고도 끝맺음을 못하는 경험이 수도 없이 많답니다. 하지만 필사를 하거나 생각을 담는 글을 쓸 때면 반드시 맺음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불확실성이 팽배한 일상에서 완성이라는 의미를 연필이 붙여주는 것 같아요.
Q2. 연필로 필사를 하거나 생각을 정리할 때 주로 어떤 내용으로 채워나가시나요?
A. 저의 연필은 다양한 작가들의 문장들로 안내해 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생각나는 문장들을 자유롭게 끄적거리게 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합니다. 국내작가들뿐만 아니라 해외의 작가들의 문장을 쓰고 있으면 연필로도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어떤 특정한 문장을 쓰기보다 필사책에서 전하는 소중한 문장들을 쓰고 있자면 내용에 상관없이 마음이 정돈되고, 글씨체도 신경 쓰게 되고, 전체적인 틀까지 고려하게 됩니다. 글을 정돈하면 마음마저도 정리된다는 것을 연필이 알려주는 것 같아요. 한편 내면에서 떠오르는 글을 쓰기가 어려울 때는 항상 연필이 없는 때인 것 같아요. 하지만 연필이 있으면 앞서 말한 것처럼 마법이라도 부린 듯 조심스럽게 한 문장이 완성되기도 한답니다. 아주 날것의 문장이라 세상에 내놓기 부끄럽지만 연필을 잡고 쓴 문장은 아주 귀하다고 느낍니다. 덕분에 연필에게 감사함마저 느끼는 것 같습니다.
Q3. 연필은 삶의 어떤 순간들을 기록하는 도구인가요?
A. 연필을 집어드는 순간은 늘 공허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사실 불안함을 느낄 때 집어드는 순간인 것 같아요. 직장일을 구하지 못해 불안함이 어느 순간 엄습할 때는 연필이라도 들 수 있는 용기는 그 순간을 이겨내는데 가장 도움이 되거든요. 그때부턴 불안함도 쓰고, 채우고 싶은 마음도 쓰고, 생각나는 모든 것을 쓸 수 있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마주하게끔 해줍니다. 연필을 든다고 해서, 문장을 쓴다고 해서 현실은 달라지지 않지만 내 마음가짐은 확실히 가벼워지기도 하고, 다음 스텝을 생각하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불안을 쓰는데 불안을 이겨내는 천연 진통제 같다고도 생각합니다. 글을 쓰기 전 잡게 되는 연필의 촉감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을 지그시 눌러주고 진정시키고, 창작의 즐거움을 2배, 3배, 5배 이상으로 증폭시켜 주는 것 같아요. 결국 연필은 지나간 순간보다 지금의 순간들을 기록하게 해주는 신묘한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Q4. 당신이 처음 연필로 쓴 문장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A. 처음 연필로 쓴 문장이라 한참을 고민해야 할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자음과 모음을 쓰는 연습을 하고, 가, 나, 다 같이 자음과 모음을 혼합한 단어 쓰기를 연습하고 언어를 배우듯 일상 속에서 흔히 쓰는 즉, 인사말을 먼저 씁니다. '안녕하세요'나 '나는 학교에 갑니다'같은 문장을 받아쓰는 연습을 하게 되는데 연필로 쓴 첫 문장이 바로 인사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어쩌면 문장은 가장 가까운 것부터 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연필을 집어 들고서 말이에요. 그리고 한국의 문화 중에 '돌잡이'라고 있습니다. 생후 1년째 되는 날에 잔치를 여는데 향후 장래희망과 운명을 점치는 이때만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문화로서, 현금, 청진기, 판사봉, 실, 연필 등 다양한 도구들이 나오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그것들 중 하나를 잡으면 어른들은 그 도구들에 맞는 축하인사를 전합니다. 서두가 길었지만 저의 돌잔치 때 연필을 잡았다는 후문을 부모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어쩌면 돌고 돌아 지금에 와서 연필을 다시 떠올리는 것을 보면 연필과 기나긴 연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여담으로 전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첫 문장을 쓰게 되지만 그 문장을 쓰게 도와주는 연필과의 인연은 저에게 특별히 크게 와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Q5. 끝으로 나에게 연필은 이것이다라고 정의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당신에게 연필은 무엇인가요?
A. 저에게 연필은 '가장 느린 걸음'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빨리 걸을수록 놓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불안 속을 걸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그럴 때 연필 한 자루는 쉴 틈 없는 일상을, 좁아진 생각의 시야를 환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을 수 있도록 기꺼이 흑심을 닳아내어 줍니다. 쓰면 쓸수록 한 발자국 내딛을 여유가 마음에 와닿을 겁니다. 체감되지 않을 그 한걸음 한걸음 속에서 '나의 속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너무나 빨라진 세상의 타이밍에 조급하고 불안하다면 가장 느린 걸음을 가진 연필에게 손을 내밀어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