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책이다 / 이동진> 리뷰
제게 좋은 책이란 너무나 흥미로워 한번 손에 들면 단숨에 끝까지 독파해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일보다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여백을 발견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는 읽고 있는 순간들의 총합이 아닌 셈입니다. 독서는 바깥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책 속에서 구현된 세계 속으로 뛰어들 때 시작되지만, 책 속의 세계에서 언뜻 일렁이는 어떤 그림자의 의미를 다시금 이 세상에 되비쳐볼 때 비로소 완성되기도 합니다. 책 읽기란 결국 철조망이 촘촘하게 쳐진 뻘밭 같은 세월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의 서툰 포복술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밤은 책이다, 프롤로그>
리뷰 >
영화평론가 이동진 개인의 사유가 가득 담긴 책. <밤은 책이다>란 제목은 라디오 방송 작명 과정에서 착안한 것이지만, 수많은 목차로 엮인 개인적 사유와 적절히 어우러지며 우연스레 딱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누군가의 사유를 들여다본다는 건 꽤나 큰 위안을 준다. 나는 나의 삶을 내 방식대로 살며, 내 무늬대로 그려 넣고, 너와는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삶을 이루고 있다는 그런 다독임 말이다. 그럼에도 읽고 있는 그동안은, 마치 정답이 쓰여 있지 않은 해설지를 두고 내 삶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는 꽤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녔을는지.
그런 뜻에서 책에 대한 책 -혹은 누군가 표현해 낸 ‘책의 말들’- 은 세상에 내던져진 개인의 사유를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 압출을 하든 성형을 하든 원하는 모양대로, 자신만의 진리를 창조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책이 좋다.
수십 권의 책이 등장한다. 개중 십 분의 구가 난생처음 본 제목인 것으로 보건데, 아직 읽어야 봐야 할 책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잠시 설레었다. 동시에 단 한 계단도 올라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몇 날 밤을.
“남의 불행을 동정하다가도 그 사람이 그 불행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는 걸 목도하면, 이상하게도 악의가 마음속에서 꿈틀대기도 하는 것이지요.”
“독일어로 된 심리학 용어 중에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어로 ‘피해’를 뜻하는 단어와 ‘기쁨’을 의미하는 단어가 결합된 이 용어는 번역하자면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감정을 일컫지요. “
<샤덴프로이데 / 라쇼몽,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샤덴프로이데-를 숨기는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서다. 남의 불행을 고소해한다는 건 마음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감정이다. 외부로 표출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갖는 것만으로는 일단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속에서만 끝났어야 할 감정들이 거침없이 표현되는 사회는 지옥과 다를 바 없다. 이미 비난과 비판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 넷상의 소통을 제외하면, 실제로 겪는 인간관계에서 사실 찾기 어렵다. 가깝든 멀든, 같은 공간에서 실제로 만나거나 혹은 만남이 예상되는 대부분의 관계에선,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의 이미지가 깎여나가는 건 물론, 그런 삶은 사회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각 문화에 따른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감정을 숨기는 일은 인간사에 꽤나 자연스러운 현상인 듯싶다.
결국 피할 수 없단 말이다. 타인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을 너무 죄악시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시기나 질투 따위는 내 안에서 굴리는 것이 훨씬 의미 있다. 충분히 숙성되면 그제야 꺼내볼 수 있다. 숙성된 감정은 이미 부정에서 이미 벗어나 있을 테니.
“ 아마도 어느 누구도 가리고 싶은 인간 존재의 야누스적인 측면을 정면으로 폭로하는 것을 환영할 수 없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무의식도 의식을 통해 말해질 수밖에 없다는 모순,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말로 할 수밖에 없다는 무의식과 의식의 모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
<말의 자격 /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 남경태 >
무의식. 요 근래 쓰고 싶지 않은 단어 중 하나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많이 쓰는 단어이지 않은가. 무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남용되는 표현에 약간의 구토감을 느낀다. 뜻과 맥락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어떤 단어를 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갔다’ 따위로 퉁치려는 심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자도 말했듯, 무의식도 의식의 틀 안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운명이기에 우리는 이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것이 좋을 듯싶다. 자가당착에 빠지기 십상이다.
“ 아마추어! 아마추어! 이 말은 학문이나 예술을 애정과 즐거움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해 알고 싶은 열정 때문에 추구하는 사람들을 생업으로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얕잡아 일컫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 일로 벌어들이는 돈만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멸은 빈곤, 배고픔 또는 기타 강한 욕구가 있는 사람만이 그 일을 진지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천박한 신념에 뿌리를 박고 있다. 일반 대중의 생각도 같으며, 따라서 그들도 같음 목소리를 낸다. ‘전문가’에 대한 일반적인 존경심과 아마추어에 대한 불신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실 아마추어에게는 예술이나 학문 자체가 목적인 반면, 전문가들에게는 수단일 뿐이다. 학문이나 예술을 가장 진지한 열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그 일 자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는 사람, 그래서 순수한 애정으로 그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최고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언제나 이런 아마추어들이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아마추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마토르에서 왔다.”
< 일에 대한 사랑 /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C.W체람 >
나는 글쓰기에 조예가 깊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절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마추어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자, 돈을 좇지 않는 자-란 저 말이 꽤 위안을 주었기 때문일까. 한편 아마추어란 위치는, 현재 가지지 못한 걸 애써 외면하게 해 주는데 효과가 있다. 결국 ‘글쓰기 프로’가 되고 싶다. 유려한 글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고, 글쓰기로 돈도 벌고 싶은 생각도 있다. ‘글쓰기 아마추어이시군요’ 보다는 ‘글쓰기 프로시군요’가 아무래도 듣기 좋지 않은가. 인정 욕의 굴레에서 벗어나긴 글렀다. 꾸준히 글을 쓰려면 애정과 열정만으론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