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 다미엥 클레르제-귀르노> 리뷰
키에르케고르가 위대한 이유는 살면서 경험한 소소한 경험들을 우리 인간 모두에 관련된 실존의 비극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비극을 포착할 줄 알았다. 그가 나름 고통을 견뎌가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약점과 선택을 포함해 자기 자신을 인류의 패러다임으로 삼으며 실존주의 철학자의 모습을 실천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애>
리뷰>
나는 절망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언제 절망을 느낄까? 지나간 후 그것이 절망이었음을 느꼈을 뿐일까? 예방할 수는 없을까? 가끔씩 찾아오는 절망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내가 겪었던 그 감정은 정말로 절망이었던가?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위험도는 다르다고 구분한다. 하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고 싶으나 되지 못해 느끼는 절망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느끼는 절망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자살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리 애써도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자 결국 선택하는 것이 자살이다…… 점점 강해지는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
감정에 대해 하나하나 배우는 일은 고통스럽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읽고 말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선 진득한 무언가가 묻어 나오는데, 그리 유쾌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타인의 견해를 이해하면서, 완전히 이해 못 한다 하더라도 삶을 실존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른이 된다는 말일까.
당연함에 ‘적당히’ 반문하는 방법을 알게 된 인간은 어른이라 봐도 될까. 적당히. 제 나름대로의 주관적 진리는 사람을 ‘적당히’ 생각하게 만들지만, 적당하단 말처럼 모호한 표현이 더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처럼 대상을 철저하게 개인으로 둔다면 언제나 모호한 당위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개인의 감정은 당사자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도 감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한계가 분명 있지만, 적어도 타인이 판단한 자신의 감정과는 많이 다르단 걸 우리는 모두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적당함의 기준을 마련해주는 일이 철학자의 사명 중 하나라지만, 듣는 자에게 뒤틀린 사유를 보여주어도 괜찮단 말인가.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개인의 본성은 태초부터 뒤틀려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자아와 긴밀히 관계를 맺을수록 지금의 모습으로 만족할 수 없다. 잘 생각해보면 자아와 지금의 모습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는 극단적으로 모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모순은 두 가지 진술이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모순은 진정한 난센스다. 모순은 이와 같은 부조리한 성향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절망에 빠지면 모순을 느끼며 삶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순의 영향>
열정, 절망. 열정, 절망. 열정, 절망
대상에 열정적으로 몰입한다. 내 몸은 현실에 놓여있어 유한함을 느낀다. 내 정신은 무한함을 향한다. 자아에서 벌어지는 유한성과 무한성의 괴리는 우리를 빌어먹을 절망에 빠뜨린다. 절망은 대상에 몰입하는 열정에 지워지곤 한다. 그리고 다시 실존의 한계에 절망에 빠진다. 무한의 굴레. 아아. 키에르케고르의 사유를 나는 이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겠다. 지금 상태로 더 깊이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 폐활량이 좋아지면 언젠가 다시 들어가 보겠다.
실존, 실존, 참으로 우울하고 차분하다. 얼마나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할까? ‘실존주의’에 권태가 느껴진다. 권태는 실존의 굴레에 포함된 관념이니, 역설적이게도 권태를 느낀다는 건 다시 실존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말이 된다. 괴롭다, 괴롭다. 벗어날 방도가 없다. 니체를 찾게 된 이유다. 그는 결국 희망과 극복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내가 조심해야 할 건 타인의 내면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 힘들겠구나, 절망스럽겠구나 따위의 추측이나 추임새는 당분간 쓰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말하는 대부분의 말을 의심하고 올바른 표현인지 고민하는 요즘이다. 다시 절망에 들어서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