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드라이브 마이 카 / 하마구치 류스케 3회차 감상 후기
관계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소중한 가족, 연인을 포함해, 생면부지의 타인, 그리고 길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까지. 모든 관계는 ‘내가’ 인식한 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관계가 있다, 없다라는 문장도, 이것이 관계라는 무진장 큰 범주안에 포함시켜 해석할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관계’라는 단어하나, 표현으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는 만능도구이다. 세계의 모든 희비극은 관계로부터 나오며 관계로써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드라이브 마이카>라는 세시간짜리 영화를 보며 ‘관계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해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했지만, 아직까지 명쾌한 해석을 얻지 못했다.
<드라이브마이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없는 남자들> 단편집 중 셋의 에피소드를 영화화 한 것인데, 다루고 있는 주제가 달랐음에도 소설과 영화에서 받은 메세지는 매우 비슷했다. 나는 해당 영화를 평론하고 분석하고자 할 생각은 없다. 다만 관람회차가 잦아질수록 영화가 주는 메세지 교집합이 점점 선명해져 이를 비로소 글로 환원시킬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이 같은 글을 남기게 된 것이다. 다음은 1회차, 2회차, 3회차 관람시 해두었던 각기 메모들의 공통된 사유다.
관계의 시작점에 선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것.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 어떤 관계도 시작되지 못 한다는 것.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관계도, 그 또한 누군가가 손을 먼저 내밀어주었기 때문에 연결된 관계다. 본인과 타인의 관계가 어느지점부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이다. 관계의 시작점이 모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흔히 벌어지지 않는 일임을 인지한다면 현재 본인이 관계하는 모든 타인들이 소중해질 것이다.
두번째. 지속되는 관계에서도 다시 손을 먼저 내밀어야 하는 상황이 분명히 온다는 것. 찜찜해도 별것 아닌 것이라 여겨, 그냥 넘어가는 일이 있지 않은가. 그러한 관계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고, 경험했다. 어째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는가. 그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결리는 걸 그냥 두어 썩게 만들었는가. 결국 이 관계가 단절되고야 말았는가. 관계의 단절을 우리는 정말 피할 수는 없는 것인가.
세번째. 단절된 관계를 다시 이어붙이는 것이 가능한가. 단순한 오해나 편견에 기반한 관계의 단절을 넘어, 소멸에 이른 대상과는 관계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 믿는다. 물리적인 관계는 단절될지언정, 스스로의 기억을 재해석해 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타인일지라도,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당신의 머릿속에 대상을 불러오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상의 타인이지만 내면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와 대화한다면 불러내어 내가 잘못했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관계는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네번째. 관계의 단절은 내 탓이 아니다. 물리적 접촉을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이유는 세계의 속성 때문이다. 소멸 말이다. 물리적 소멸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이며 이를 지속하고자 애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자신이 살아있다면, 살아있다 느낀다면 눈앞에 타인이 없더라도 관계는 지속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아무리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도,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보는 건 무리죠. 자신이 괴로워질 뿐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제대로 엿볼 수는 있을 겁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마음과 능숙하게 솔직하게 타협해 가는 것 아닐까요. 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삶의 태도에 관한 한, 비교적 선명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다. 관계를 어떻게 시작할 것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지속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한국식 A형 기질,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는 내 기질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먼저 바꾸고 싶은 태도는 일은 무어냐, ‘먼저 다가가기’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관계는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