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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양의 진주 Sep 13. 2022

한국 의사의 배신

죽음에 대해 모르는 듯이 살라 하였다

    수술이 필요한 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몇 개월을 지체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을 찾은 나는 여러 차례의 진료를 받으며 나에게 사용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 한 기계들을 접했다. 컴퓨터 화면 같이 생긴 패널에 얼굴을 갖다 대보라고 해서 댔더니 진료실 내 에어컨 바람을 다 받고 있었던 패널의 찬기가 내 얼굴로 전달되었다. 매트 같이 생긴 진료실 침대에 누워 보라고 하더니 온 몸에 패치 같은 것들을 붙여 전기 강도와 파장을 측정했다. 예약 시간이 되어 찾아간 세 번째 진료실에는 다시 매트 같은 침대에 올라 누워 보라고 하여 누워서 기다리고 있으니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세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의 미동만 있어도 바로 좁게 느껴질 공간에 몇 초만 버티고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한 시간 동안이나 있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꽤 길게 공간의 답답함을 이겨내야 했다. 시력검사 때 보던 장소들에 내가 직접 가서 뛰어다니는 기분을 상상하고, 바닷가에 앉아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듣는 상상을 하고, 휘휘 소리를 내며 아주 높은 곳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된 상상을 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진료를 받았다. 병원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내가 불안감과 긴장감을 느꼈을 때 갑자기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겠다며 생각해낸 그림들이었다.

 

    그 후 의사의 지시에 따라 병원에 입원을 했다. 입원 기간 동안 수술 전까지의 지시를 따르느라 병원밥 외에는 특별히 다른 음식을 먹지 않으며, 책을 보거나 옆 침대에 있는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심심해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는 TV로 눈길을 돌리다가, 여기저기서 과일을 깎아 먹는 소리나 이야기 나누는 소리들을 들으며 지루함을 달랬다. 그렇게 있다 보면, 간호사가 와서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오늘도 잘 쉬고 있었냐며 말을 걸어왔고, 피를 뽑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하면 팔목을 내어주었다. 그런 후에는 피곤이 갑자기 몰려와서 다시 낮잠을 자고, 실컷 자고 일어나면 더 이상 잠도 안 와서 산책을 나갔다. 그러다 소등을 한 방에 들어가면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안 오는 잠을 청해야 하기에 TV, 소파, 자판기가 놓여 있는 휴게실에 앉아서 지나가는 환자와 가족들이 천천히 걸어 다니는 것이나, 환자 이야기, 일상 이야기, 퇴근 후 먹을 저녁밥 이야기를 나누는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구경했다. 더 버티다가 잠 들어서는 내일 아침에 또 늦잠을 잘 것 같다는 생각에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보고, 밝은 빛이 눈에 들어오면 잠을 잘 못 자는 나는 눈가리개를 쓰고 잠을 청했다.


    수술하는 날 마지막 준비를 마치고 락스타(rock star) 머리를 한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이동되었다. 충분히 걸어 들어갈 수 있는데 굳이 말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환경이 낯설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만 있었지, 수술 과정에 대한 불안감이 있지는 않았다. 내가 누운 침대를 끌어 수술실로 데려가 준 간호사들이 내가 필리핀에서 왔다는 걸 알았는지 필리핀에 가면 뭐가 있냐고 물어보길래, ‘전 그거보다 이 근처에는 구경거리가 뭐가 있는지 궁금해요’라고 말하니 ‘여기요? 음’이라고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억이 끊겼다. 그 근처에 어떤 구경거리가 있는지는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내 질문에 대답을 해줬는지 안 해줬는지, 눈이 감기는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는지, 한참 이야기하다가 어느새 보니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술이 진행되었고 약 6시간 동안 나는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고 나중에나 전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나는 며칠 전부터 적응해 놓은 병실에 돌아와 있었고, 너무 오랜 시간 한 방향으로만 누워 있어 눌려 있던 근육들이 많이 아팠다며 나에게 호소했다. 매일 자고 일어나는 시간보다는 더 짧은 시간 동안 그 수술실에 누워 있었는데도 말이다. 역시 나는 자면서 이리저리 많이 뒤척이는 타입이었나 보다. 근육통이 너무 심해 견디기 힘들 정도였는지, 말이 어눌해 정확한 표현은 못 하겠으나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자기 심정을 표출해야겠는 1살짜리 아이처럼 ‘아파요 아파요’라며 간절히 울어댔다. 웬만한 진통은 잘 참아내는 씩씩한 줄 알았던 나 자신이 그 순간에는 한없이 연약하고 힘이 없었다. 간호사들을 불러달라 하여 도와달라고 하니 진통제를 여러 차례 맞춰주었고, 아팠다 잠들었다를 몇 번 반복한 사흘 정도가 지나니 어느새 고통은 가라앉았다. 근육통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상처가 아물고 처방된 약을 모두 복용해야 퇴원이 가능하다고 하여 그 후로도 3주 가까이 병원에 있었다. 그동안 전보다 조금 불편해진 몸상태로 수술 전 일상을 다시 반복했다. 병원밥을 먹으며 책도 보고, 옆칸 환자들의 이야기도 엿들어 보고, TV도 보고, 산책도 하고, 간호사가 오면 현재 상태에 대한 질문들과 함께 처음 보는 이들의 손길에 의한 돌봄도 받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 같은 데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로만 알았던 '수술 실패'였다.

 

    낯선 병원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는지 요즘도 한 번씩 그런 꿈을 꾼다: 병실에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나의 모습과 그 후에 일어난 일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른 상황이었을 때의 경우. 의료 마스크를 끼고 있어 더 차갑게만 느껴지는 인상의 간호사들이 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내가 누운 침대를 수술실로 끌고 들어간다. 그전에 나는 수술 날 아침부터 가족 톡방에 이런저런 상황 보고를 한다. ‘오늘 수술하는 날이라서 금식이래.’ ‘방금 의사가 준비 됐냐고 확인하러 왔다 갔어.’ ‘나 이제 들어가. 우리 가족 모두 사랑해.’ 수술실로 들어가는 길에 나는 평안한 생각을 억지로라도 해봐야 하는 정도로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처음 해보는 수술이기에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지나치게 생각하느라 안정을 취해야 하는 나는 괜히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나, 진지하게 일하러 모인 그곳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단답을 한다.


    수술이 시작되고 내 몸속을 고쳐내어 정상인 상태로 만들어 내야 하는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의료진은 온갖 신경을 곤두세워 열심히 집중한다. 그러다 삐- 삐-가 아닌 삐삐삐삐삐삐삐- 하는 소리와 함께 당황한 의사들은 허둥지둥 여러 개의 도구들을 이용해 이리저리 내 속을 파 해쳐 본다. 그러다가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의료진은 알게 된다, 어떤 수를 써도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는 것을.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새삼스럽지 않은 이 상황에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절차대로 조치를 취한다. 등록되어 있는 연락처로 내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어떻게 처리를 하면 될지에 대해 의논한다. 병원의 연락을 받은 우리 가족은 얼른 비행기표를 끊어 한국으로 오려고 할 것이고 그동안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이모, 삼촌들이 먼저 병원으로 와준다. 다행히 필리핀과 한국은 그리 멀지 않아 뒤따라 병원에 도착한 엄마는 주저앉아 내가 쓰던 침대보를 손수건 삼아 눈물 콧물을 훔쳤을 것이며 아빠는 의료진에게 따져가며 병원에서 난리를 피운다. 그게 아니라면, 오는 비행기에서 이미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병원에 도착한 엄마 아빠는 이미 혼과 기가 빠져 있어 힘없이 흐느끼며 숨 쉬지 않는 자식을 바라본다. 그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 천으로 덮여 있는 내 몸에서 내 혼은 빠져나와 너무 억울해서라도 엄마 아빠를 보고 떠나겠다며 병실 천장에서 지켜본다, 슬피 우는 그들의 모습을.


    나는 사실 그 수술의 실패로 병원과 의학 기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필리핀에서는 돈만 많이 들고 정확한 해결책은 주지 않는 병원들이 빈번하기에 병원을 잘 찾지 않았고, 상담이 꼭 필요하겠다 싶으면 초록 검색창으로 가거나 지인을 통해 묻곤 했었다. 그러다가 끝내 한국 병원을 찾은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절망스러운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가까운 사람이 수술을 받으러 간다고 하면 희망차게 기다리기보다는 악의 상황에 먼저 대비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 다른 병원에도 가 꼭 다른 의사의 진단 (second opinion)도 받아 보라고 권한다. 물론 모든 의사나 병원이 돌팔이라는 것은 절대 아닌데, 몸이 가장 안 좋을 때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곳이 나의 기대를 저버리니 그에 대한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실패의 원인으로 그 병원을 탓해야 하는지, 의사를 탓해야 하는지, 실패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더 높았다는데 불구하고 끈질기게도 나를 완쾌시켜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탓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서 재수술을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다른 병원으로 간다고 해도 외로운 병원 생활과 수술 실패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또 몇 개월을 지낼 자신이 없다.


    다행히 내가 꾸는 꿈은 자고 일어나면 잊히는 허상일 뿐이다. 현실에서의 나는 수술 실패의 경험은 있으나 재수술을 고려할 만큼의 삶의 희망을 붙들고 있다. 이 경험으로 인해 사람이 만들어낸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순수히 믿지만은 않아야 한다는 것, 마음을 다 해 하나님의 능력을 우러러보았다고 생각한 내가 상황이 들이닥쳤을 때 바로 불신을 갖는 조잡한 믿음만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언제든지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 순간에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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