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물을 꿈꾸었던 화합물
화합물 (compound)과 혼합물 (mixture). 겉보기엔 유사해 보일지라도 학문적으로 둘은 본디 상이한 개념이다. 전자의 경우 두 가지 이상의 원소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형태로, 쉽게 말해 물리적인 힘으로는 분리할 수 없는 온전한 하나의 물질이다. 그에 반해 후자는 결코 단일한 물질이 아닌, 그저 뒤섞였다는 표현이 알맞을 특정한 상태에 불과하다. 이에 한 문장으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페어웰]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복합체인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 혼합물적 과도기를 겪어내고 다시금 화합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영화다. 아울러 어쩌면 그녀가 은연중에 머금고 살아온 내재적 불안을 간접적으로 떨쳐내는 영화다.
먼저, [페어웰]을 이끄는 장르적 동력은 코미디이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하이옌 (빌리의 아버지)의 유머는 사실상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처럼 보인다. 집에 돌아온 아내에게 반려묘와 장모의 죽음을 알리는 남편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내포하는 바는 분명하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이지만 변치 않는 사실을 전달하는 태도의 극단적 변화는 듣는 이에게 실소를 자아낸다. 이는 할머니의 예정된 죽음을 그녀 스스로에게 즉시 알리지 못하고 별개의 허구로 이를 감추는 가족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일치하며, 전반적인 코미디의 발생 역시 대부분 그러한 모순적인 태도의 우스꽝스러움에서 기인한다. 할머니의 죽음은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게 실로 비극적인 일이다. 따라서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유도하는 인물들의 감정은 무릇 슬픔이어야 마땅하나, 그들은 당사자의 면전에서 함부로 슬퍼할 수가 없다. 대신 하오하오의 결혼이라는 상반된 사건을 내세우고 자연스레 동반되어야 할 기쁨을 가면 삼아 할머니를 마주해야만 한다.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며 빌리에게 고향에 돌아오지 말 것을 종용했던 여타 가족 구성원들이 외려 더욱 애통한 감정에 휩쓸리며 펼쳐내는 엉성한 연극. 그렇게 [페어웰]의 코미디는 연극적 허구와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불수의적 솔직함이 충돌하여 빚어진 불가피한 결과다. 또한 영화가 실제 중국인들의 공동체적 가치관에서 비롯하는 일상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사실상 영화 내부에서 빌리의 가족들로 인해 간접적으로 공연되는 결혼 소동극 — 극중극 — 형식과 현실 세계에서 수많은 중국인 가족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페어웰]의 현장은 반복적으로 겹쳐지며 장르적 불가피함을 더욱 극대화한다.
다음으로, [페어웰]을 이끄는 정서적 동력은 불안이다. 외적으로는 할머니가 죽음에 관한 진실을 눈치챌 가능성에 두려워하는 가족들의 불안이 두드러지고, 내적으로는 주인공 빌리가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떠오른다. 이를 위해 촬영이나 음악과 같이 영화의 기술적인 요소들은 관객으로부터 불안감을 유도하고자 철저히 애쓴다. 비대한 헤드룸과 불균형한 노즈룸, 급진적인 클로즈업과 남발하는 슬로우 모션 등 불안정한 화면 구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과 마치 트리에의 근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음울한 음악의 사용과 같은 시도들이 조금 과도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목적 달성에는 성공한 인상이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인물을 담아내는 불안한 프레임이 공간의 영향력에 대한 반영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인물을 둘러싼 공간이 나아가 인물을 잠식하는 모양새는 빌리의 내적 불안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지역적-공간적 차이가 곧 문화적 차이와 직결되고, 두 곳에 모두 발을 걸치고 성장함으로써 어디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나약한 개인에게 일방적인 공간의 위세란 너무도 거대한 것이다. 더구나 본토 중국인들이 갖는 미국 생활에 대한 동경과 이를 애써 감추려는 날선 방어기제 가운데서 빌리는 더욱 혼란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외부로부터 계속해서 침투하는 새와 바람은 그녀 스스로의 직업적 실패와 문화적 돌출에 대한 지역-공간의 압박과 다름없다. 그것은 사실상 공간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가 품은 불안의 형상화인 셈이다.
일련의 갈등과 소동, 고백과 눈물을 거쳐, 영화는 결국 다름에 순응하고 가족간의 사랑이라는 순수한 가치에 집중한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라온 빌리는 본래 할머니를 향한 연극에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가족이 모두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불거진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중국인이야. 그걸 잊으면 안 돼." 라는 말에는 중국인으로 태어난 개인의 정체성은 오직 중국인일 뿐이며, 현재 생활하고 있는 타지의 문화적 가치와 개인 스스로의 가치관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가족들은 빌리에게 혼합물로서의 가치 판단을 강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빌리는 가족 내의 또 다른 이민자 하이빈 (빌리의 큰아버지)에게서 보다 쌍방적인 견해를 듣는다. 하이빈은 빌리가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자라왔기에, 개인이 모든 일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에 따른 책임도 개인이 진다는 개인주의적 가치관 하에 있음을 우선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의 공동체적 가치관 아래에서는, 죽음으로 인해 할머니에게 주어질 감정적 짐을 가족들이 모두 함께 분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빌리는 하이빈의 설파를 통해 일차적으로 가족의 입장을 납득하고, 결정적으로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에게 똑같이 행동했음을 인지함으로써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성장 배경에서 확립된 고유한 가치관에 더하여 가족의 그것 역시 수용함으로써 진정 화합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난 뒤 남는 것은 결국 가족을 향한 사랑이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당신이 건넸던 전부의 진심에 대하여, 뜨겁게 고마워하고 부득이한 지난 날들을 후회하면서 이제라도 행여 놓칠까 굳세게 포옹하기. 당신의 선택과 시간들을 존중하고 나에게 남은 기억과 사랑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 번 세상을 향해 힘차게 두 발 내딛기. 영화의 끝, 빌리는 별안간 소리치며 그녀 안의, 또 할머니 곁의 수많은 불안들을 날려 보낸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