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빛이요, 철은 철이로다
* 아래 리뷰는 영화 [빛과 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빛과 철]의 모토는 거칠게 말해 단순하다. 타인과 나누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란 불가함을 감추어진 사실의 연쇄 폭발로 증명하기. 많은 관객들이 각본의 자기파멸적인 전개 형태를 보며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영화들이 떠오른다고들 한다. 특히 인물들이 그토록 원하는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이가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거나, 의식이 없는 자가 흘리는 눈물이 등장하는 것, 아이의 증언이 사건 전개에 거대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 등은 파르하디의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와 상당한 유사점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잘 쓰여진 각본의 흡입력은 둘째 치고, 세상의 비정함에 진즉 체념한 듯 건조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남편들의 사고 원인이다. 이에 영화는 사실상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고 지점에 쓰러져 있던 고라니 사체를 굳이 비추고,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로 하여금 급작스레 마주케 함으로써 그 의도를 넌지시 내비친다. 예고 없이 튀어나온 고라니 때문에 발생한 단순 사고. 영남 (엄혜란 분)과 희주 (김시은 분)는 영남의 남편 남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가던 중 직접 사건을 겪는다. 남길이 아무리 사건의 당사자라 할지라도 그의 입에서 발화한 가공된 언어를 듣는 대신, 영남과 희주가 그들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내내 견지해 온 태도, 즉 타인의 말을 매개로 전달되는 진실은 반드시 훼손된다는 염세적 가치관을 지속하기 위해 영화가 인물들에게 제동을 거는 양상이다. 직전 희주에게 물어진 영남의 질문, “왜 하필 이 길로 가요?”, 그에 대한 희주의 대답, “이 길 밖에 없어요.” 이 짧은 문답에서 가냘프게 강조되는 것은 진실을 획득하는 방법의 유일성이다. 진실을 회피해온 이와 책임을 전가해온 이가 비로소 깨우친 그 유일한 방법이란 결국 사건을 되돌려 직접 겪어내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영남과 희주는 실로 운 좋은 사람들이다. 어떤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실제로는 드물다 못해 대개 불가능할 지나간 사건의 직접 체험을 영화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후 그들은 소통의 일방향적 한계를 체감하고 서로의 문제를 추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미 공장은 불탔고 은영 (박지후 분)은 사라지고 없다.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영남의 딸 은영은 세 명의 주요 인물 중 캐릭터의 감정적 근원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다. 은영이 영화에서 사라지는 시점이 그녀가 영남과 희주에게 차례로 감정적 진실을 고백하고 난 직후라는 것을 상기해 보라. 먼저 은영은 그들 중 유일하게 남길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고, 이를 영남에게 고백한다. 이후 보충되는 회사 과장 기원 (조대희 분)의 설명에 따르면 실제로 남길은 약간이나마 자살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영남은 남길의 자살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고, 희주 역시 번개탄을 싣고 음주운전을 자행했다던 남편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다음으로 은영은 희주에게 장례식장에서의 기억을 고백한다. 은영은 화장실에서 스스로를 마구 구타하던 희주를 보았다. 그 때 희주는 사고의 주동자가 자신의 남편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시기였고, 이것이 이혼 소송 중이던 자신과의 관계가 남편의 정신 상태를 망가뜨렸기 때문이 아닐까 자책했을테다. 이렇게 두 건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은영은 사고가 난 인물들의 것으로 추측되었던 감정적 진실에 내내 가장 근접해 있었음이 밝혀진다. 산재 후 회사로부터 부당하게 대우 받던 남길의 절망, 은영과의 실패한 관계로 인해 은영의 남편이 겪었던 정신적 붕괴. 거꾸로 보면 은영은 동시에 사고 후 남겨진 인물들의 감정적 실태를 똑바로 마주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산업 재해로 고통 받았지만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해 서서히 매몰되고 있었던 남길의 정황을 영남은 애써 회피하고 있었고, 희주는 사고 당시 상대 운전자였던 남길을 향해 남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진실을 회피해온 이와 책임을 전가해온 이. 은영은 이들 모두의 내적 진실과 연결되어 있다. "아빠가 정상은 아니었잖아", "나 때문에 언니가 고통 받고 있어" (기억의 한계로 인해 정확한 언어를 되새기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 드린다) 와 같은 대사들은 결코 허투루 쓰여진 것이 아니다.
다시 돌아와서, 정말 사고의 원인이 고라니로 인한 단순 사고사에 불과하다고 가정한다면 은영의 사라짐이 내포하는 감독의 비정한 태도는 더욱 확고해진다. 앞서 기술했듯 인물 모두의 감정적 진실과 연결되어 있는 은영이 갑작스레 영화에서 제거되는 것은, 그러한 내적 사유들이 우리네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희주가 나가고 난 뒤 창문 밖을 내다보는 은영을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구도의 쇼트가 삽입되어 있다. 이로 인해 관객은 은영이 스스로 떨어져 죽음을 택하지는 않았을까 불안해진다. 개인적으로 사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으로, 은영이 죽었는지 아닌지는 사실상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영화가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렸다는 사실 자체다. 이리도 복잡한 인물들의 내적인 연관 관계에도 불구하고, 남길이 혼수 상태에 빠지고 희주의 남편이 사망한 이유는 단순히 고라니가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거대한 악몽인 것이다. 제각각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내적인 의도, 감정, 생각 등을 서로 온전하게 공유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나아가 그러한 요인들은 현실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 실로 비관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무너진 인물들을 체화하는 염혜란 배우와 김시은 배우, 또 영화의 감정적 열쇠와도 같은 역할을 미스터리하게 수행한 박지후 배우를 제외하고, 기타 조연들의 연기는 다소 의아한 인상을 자아낸다. 아무래도 감독의 디렉션에 오류가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하게 되는데, 지독하게 염세적인 본작의 세계관으로 인해 그들의 어긋나는 합마저 의도적인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배종대의 세상에서 빛은 빛이고 철은 철일 뿐이다. 가령 빛으로 대변되는 희망이라거나 철이 특정하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같은 수사학적 메타포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 무지하게 피곤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