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기어코 유보하도록 만드는 확신에 찬 목소리
* 아래 리뷰는 영화 [미나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 가족들을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 도대체 누굴 위한 성공일까. 멍청한 미국인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똑똑한 한국인답게 머리를 써야 한다고 믿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했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줄 알았다. 아버지는 이미 엎질러져 버린 물에 절망한다. 아이들이 아빠가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은 봐야 하니까, 내가 벌이는 모든 일은 다 가족을 위한 것이니까, 아버지는 돌아갈 길이 없다.
성공은 가족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 다같이 함께하여야 비로소 가족이 완성되는 것이라 믿었고, 이 중에 누구 하나라도 빠지면 더 이상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머나먼 타국에서 견뎌낼 자신이 없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한 아이가 걱정스럽다. 주변에 뭐 하나 변변한 시설조차 없는 마을이 원망스럽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사망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홀로 한국에 남겨진 채 그녀 자신은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다. 하지만 그런 남편조차 이제 가족의 울타리에서 이탈하려 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의 어머니는 악화된 노환으로 몸이 성치 못하다. 나에게 남은 것은 남편과 두 아이 뿐인데, 어머니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제이콥 (스티븐 연 분)과 모니카 (한예리 분)는 이렇듯 상반된 가치관을 가지고 영화 내내 대립한다. 모든 일이 기대했던 만큼만 잘 되었다면 애당초 이러한 갈등 따윈 없었겠지만, 매정한 삶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을 단번에 얻지 못하도록 막는다. 마치 성공과 가정은 양립할 수 없음을 고스란히 겪어낸 자가 낮게 읊조리는 듯, [미나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구분된 전형적인 젠더 롤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이에 대해 쉽사리 판단하는 대신 측은한 눈초리로 관망한다. 나아가 외할머니 순자 (윤여정 분)라는 이질적 존재를, 개인적 경험에 의거하여 오롯이 구현한 현실 재현적 공간에 대뜸 투입함으로써 정체된 상황의 타개를 기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말의 의심이 발생한다. 한국어를 쓰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식 교육 방식을 묘사함으로써 아시안,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인 이민자 가정의 구색을 갖춤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보편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서사의 핵심으로 소비되는 영화의 모습은 퍽 낯이 익다. 그러니까, [미나리]는 한국인 가정이라는 특수한 탈을 쓴 평범한 가족극인 것이다. 여기서 평범함이란 표현은 결단코 타국에서 지난 세월을 힘겹게 살아남았던 수많은 이민자 가족들의 노고를 폄하하고자 쓰인 것이 아니다. 대신 이미 다른 영화와 미디어들에서 적지 않게 보아온 이민자 가족의 고난을 재반복하는 양태에 대한 기시감의 산물이다. [미나리]가 다른 영화들로부터 갖는 차별점은 한국에서 비롯하는 가족의 문화적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감독은 이 점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바로 그래서 순자의 캐릭터가 무엇보다 중요했을테다. 최근 빈번히 거론되는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식들 (과 은근한 수상 기대)은 순자 캐릭터에 대한 영화의 의존도가 그만큼 절대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자의 역할은 영화 속에서 제이콥과 모니카의 중대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영화에서 두 번 크게 부딪힌다. 초반부 가족이 트레일러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폭풍우가 몰아쳤던 때, 아직 각자의 불안과 불만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던 시점 그들은 한국에 두고 온 서로의 가족을 거론하며 언성을 높여 다투었다. 결국 순자가 미국에 찾아와 함께 살기로 결정함으로써 불화는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두 번째 갈등은 후반부 데이빗의 진료를 위해 찾아온 대도시의 병원과 채소 공급 계약에 성공한 직후 가게 앞마당에서 연달아 벌어진다. 성공과 가정에 대한 좁혀지지 않는 서로의 입장 차를 여실히 체감하고서, 마침내 관계를 정리할 마음을 먹고 나서야 사건은 발생한다. 순자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쓰레기를 소각하던 중, 바람에 번진 불꽃에 의해 애써 수확한 채소 창고가 전부 불타버린 것이다. 이후 묘사되는 모습에 따르면 가족은 결국 해체되지 않고 다시금 함께하길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갈등 양상의 상반된 두 축이었던 가정과 성공 중 후자의 싹을 다급히 잘라내고, 이미 벌어진 상처를 억지로 봉합하는 행위에 가깝다.
순자 캐릭터의 편의적인 사용법과는 별개로, 어디서든 꿋꿋이 자라나는 미나리를 매개 삼아 이민자 가족에 대해 여전한 믿음을 내비치는 감독의 속마음을 마냥 부정하긴 어렵다. 비록 '멍청한 미국인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똑똑한 한국인답게 머리를 써야 한다'는 배타적인 아집은 꺾여 버렸고 수도까지 끌어다 간신히 키워낸 작물들은 한순간에 불탔지만, 물가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뿌리내린 미나리처럼 우리네 가족 또한 다시 털고 일어날 것이라고, 감독 스스로가 바로 그렇게 살아남았다는 엄연한 증거라고 영화는 확신한다. 바로 그 실존적 확신 덕분에, 영화에 대한 순간의 의심은 잠시 미뤄두고 못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공통된 문화적 양식에서 비롯하는 집단적 연대감이라, 과연 쉽게 무시하지 못할 미나리스러운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