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 꿋꿋한 그녀들을 향한 그다운 시선
파나히의 자동차는 드물게 인내하는 시선을 가졌다. 자동차를 타고 하나밖에 없는 산길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미리 경적을 울려 나의 존재를 알린 뒤, 더 급한 쪽에게 양보하며 나의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카메라-자동차(와 영화 속의 파나히 자신)는 영화 내내 사건의 중심에서 멀찍이 떨어져 제 차례를 침착하게 기다린다.
영화는 마르지예의 영상으로 시작하지만 이후 마르지예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파나히와 그의 자동차의 위치 혹은 역-위치 에서 진득하게 바라볼 뿐 자파리나 마르지예, 또 마르지예를 숨겨준 한물간 여배우의 행적에는 최대한 침범하려 하지 않는다. 유일한 예외는 파나히가 자동차에서 잠들고 난 뒤 통화를 위해 마을로 간 자파리가 이후 욥의 아버지를 만나 어떤 부탁을 받기까지의 장면이다. 이것은 파나히가 잠에 듦으로써 그제서야 구속에서 벗어난 카메라의 일탈처럼도 보이고, 이 순간 자파리는 단순히 대리하는 역할에 그칠 뿐 부탁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파나히를 향해 있음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충분하다 못해 다소 아득한 거리를 유지하면서까지 이토록 조심스럽고 간접적인 태도를 줄곧 견지하는 이유는, 조국의 가혹한 환경에 맨몸으로 노출된 여성 배우들의 처지를 바라보는 남성 감독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물론 정부의 억압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감독 자신의 실제 형편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간에, 또 다시 멈춘 자동차를 뒤로 하고 현재의 배우와 그녀를 뒤따라온 미래의 배우는 씩씩히 나아간다. 그리고 파나히와 그의 자동차는 그녀들의 행진을 지긋이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묵묵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