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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시기 Mar 14. 2021

[라스트 레터] 편지와의 작별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

* 다음 리뷰는 영화 [라스트 레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와이 슌지는 서로를 열망하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관계를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연민한다. 그러나 본작의 경우 모녀 관계를 빙자하여 배우에게 1인 2역을 부담하고, 이를 마치 일종의 환생과도 같이 그리는 등 상상과 이입의 정도가 지나치게 과한 면모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동일한 이름과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연결됨으로써 발생했던 25년 전 [러브 레터]의 알싸한 페이소스와 분명히 다른 결을 갖는다.


오토사카 쿄시로 (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에 대한 토노 유리 (마츠 다카코 분)의 짝사랑은 영화의 플롯을 한 번 더 비틀기 위해 고의적으로 이용될 뿐, 영화가 최종적으로 천착하고 있는 실패한 사랑의 주제에서 멀찍이 떨어져 겉돈다. 언니의 부고를 전하려 동창회에 참석했다 꼼짝없이 언니의 행세를 하고, 성난 남편 몰래 끈질기게 편지를 쓰며, 시어머니의 첫사랑을 미행하다 외려 그 대상과 친분을 쌓게 되는 과정들은 가히 일본스러운 과장과 망상의 연속이다. 그러한 '일본스러움' 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코미디가 더 이상 흥미롭지 못한 것은, 어쩌면 급변하는 시대를 못 본 체 하고 여전히 옛 감성에 머물러 있는 감독 혹은 일본 영화계 자체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불규칙한 리듬의 잦은 편집과 동시에 도저히 누구의 시선인지 모를 신원 미상의 카메라는 창작자, 즉 감독이라는 영화 바깥의 절대 권력을 지속적으로 부각시킨다. 그야말로 이와이 슌지의, 이와이 슌지에 의한, 이와이 슌지를 위한 자폐적 세계다.



이와는 별개로, 영화의 후반부 아유미 (히로세 스즈 분)와 오토사카가 나누는 대화 장면만큼은 다시 한 번 과하지만 인상적이다. 아유미의 뒤쪽에서 아웃 포커스로 흐릿하게 보여지는 미사키의 얼굴이, 아유미가 생전 어머니의 감정을 대신 전달하는 순간마다 프레임 인 되는 모습은 영화의 힘을 빌려 이끌어낸 미사키의 일시적인 부활이다. 딸과 어머니의 얼굴을 통일시키면서까지 감정의 진폭을 극대화하려는 감상적인 태도에 비록 온 맘 다해 동의하지는 못해도, 120분 가량의 좌충우돌을 방금 막 목도한 관객으로서 비로소 영화가 비련의 주인공들에게 내어주는 호의를 그저 무시하기는 어렵다.



한편으로 영화는 '라스트 레터'라는 제목에 걸맞게, 편지라는 노스탤지어에 대한 감독의 동경 내지 집착을 여기서 이만 마치려 한다는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서 서술하였듯 토노 유리라는 캐릭터를 다소 무리해서까지 드라마틱하게 소비한 목적이 전적으로 편지 쓰기를 위해서라고 이해해 보자. 영화에서 가장 처음 편지를 쓰는 사람도 유리, 미사키와 오토사카를 위시한 중심 플롯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시어머니 파트에 깊숙이 개입하여 심지어 대신 편지를 쓰기에 이르는 사람도 유리, 결과적으로 소설의 형태로 완성되는 오토사카의 러브 레터를 시작하도록 추동한 사람 역시 유리다. 편지는 그야말로 펜으로 직접 꾹꾹 눌러쓴 아날로그적 전달 방식의 극단이다. 20년 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두려워했던 디지털의 도래는 이미 사회를 비가역적으로 바꿔버린 지 오래다 (https://brunch.co.kr/@one-sigi/16; '지나간 세대의 명확한 공포' 중). 이제는 그 역시 디지털의 세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지만, 지나가 버린 과거를 잊지 못하는 감독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다시금 편지를 동경한다. 그 수단이 비록 시대에 역행하는 제멋대로의 극작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감독은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다시 없을 아날로그의 추억으로 되돌아간다. 어엿한 하나의 소설로 세상에 나온 편지 뭉치가 받게 되는 세 번의 사인은 각각 [러브 레터]의 후지이 이츠키/와나베 히로코 (나카야마 미호 분), [4월 이야기]의 우즈키 (마츠 다카코 분), 그리고 [라스트 레터]의 미사키/아유미 (히로세 스즈 분)의 것이다. 소설가는 새로운 소설을 쓰기 위해, 그리고 감독은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인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함께 했던 과거의 인물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다.


이와이 슌지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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